[박종진의 만년필 이야기] 25. 역주행과 늦깎이

입력 2018-09-2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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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극장가에서는 실종된 딸을 찾는 아빠의 분투를 그린 ‘서치’가 화제이다. 지난달 29일 개봉 관객 수 3위로 출발했지만, 재미있다는 입소문에 며칠 전엔 추석맞이 대작을 밀어내고 1위까지 올랐다. 이렇게 처음엔 인기가 없다가 나중에 인기를 얻게 되는 경우를 요즘 말로 ‘역주행’한다고 한다.

필기구 세계에도 이런 역주행이 있다. 1963년 일본의 펜텔사(社)는 펜 끝이 섬유질인 ‘사인펜’을 내놓았지만, 국내에선 인기를 얻지 못해 매출이 형편없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이듬해 열린 시카고 문구 국제박람회에 출품 배포된 것 중 하나가 미국 백악관 직원의 손에 들어갔고, 우연히 당시 린든 존슨 대통령(1908~1973)이 써보고 24타스를 주문, 이의 영향으로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이후 사인펜은 더 확산되어 이런 유형의 다른 회사의 것들도 ‘사인펜’으로 부르게 됐다. 상품명 사인펜이 일반 명사화될 만큼 크게 성공한다.

약간 의미가 다르지만 필기구 세계에는 ‘늦깎이’도 있다. 늦깎이는 사전적 의미에서 나이가 꽤 들어 어떤 것을 시작하거나 성공한 사람을 뜻하는데, 몽블랑사(社) 149(1952년 출시)와 파이로트 캡리스(1963년 출시)가 바로 늦깎이 만년필이다. 공통점은 현재까지 생산되고 있는 장수 모델이며 출시되고 한참 지난 후 인기를 얻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차이점이 있다. 몽블랑 149가 전통을 고수한 반면, 파이로트 캡리스 세태(世態)를 잘 따랐다는 점이다. 당시는 새로운 필기구인 볼펜의 등장으로 만년필 매출이 바닥을 치고 있던 시기였다. 만년필 제조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잉크병이 필요 없는 카트리지 방식을 선보이고, 펜의 크기도 휴대가 편하게 줄였다.

▲뚜껑이 없는 파이로트 캡리스 만년필. 윗부분을 누르면 펜촉이 나오고 들어간다
▲뚜껑이 없는 파이로트 캡리스 만년필. 윗부분을 누르면 펜촉이 나오고 들어간다
그런데 몽블랑 149는 이 유행을 따르지 않았다. 엄지손톱만큼 큰 펜촉을 잉크병에 담가 잉크를 넣는 방식이었다. 펜의 크기는 뚱뚱하다고 표현될 만큼 컸다. 때문에 품질이 뛰어나고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지만 당시 사람들의 눈길은 적었다. 한편 파이로트 캡리스의 펜촉은 새끼손톱의 절반보다 작고 잉크를 넣는 방식 역시 탄창에 총알을 끼우듯 잉크가 충전되는 최신식 카트리지 방식이었다.

여기에 캡리스(Capless)라는 이름이 캡이 없다는 뜻인 것처럼 볼펜처럼 뚜껑이 아예 없었다. 당시 유행하는 만년필의 유행과 볼펜의 장점까지 세태를 따라도 너무나 잘 따른 것이다. 이 캡리스는 성공했을까? 당시의 것은 밀폐가 좋지 않았고 내구가 떨어져 큰 인기는 끌 수 없었다. 결국 이 둘은 1950년대 파커51, 1960~1970년대엔 파커75의 인기에 밀려났다.

그러던 중 1980년대 만년필이 부활하면서 사람들은 다시 큰 만년필을 원하게 됐다. 몽블랑 149보다 크고 아름다운 만년필은 없었다. 늦깎이 149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또 다른 늦깎이인 캡리스 역시 1990년대 후반 인기를 끌기 시작했지만 몽블랑 149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149가 전통적 아름다움이 무기였다면, 캡리스는 수십 년간 밀폐 등 크고 작은 문제점을 끊임없이 보완하여 믿을 만한 품질로 완성시킨 것이 늦깎이 인기의 비결이었다.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역주행이든 늦깎이이든 잘 만들어진 것은 언제고 반드시 빛나기 마련이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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