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유럽 의회 연설에서 고국인 미국을 향해 연방 차원의 개인정보 보호법 제정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기업에 의한 개인정보 남용을 방지하려면 유럽연합(EU)이 5월부터 시행한 일반 개인정보보호법(GDPR)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4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쿡 CEO는 이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국제개인정보보호기구회의(ICDPPC) 기조 연설에서 심각한 개인정보의 오용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개인정보가 군사적 효용성과 함께 우리에게 무기화돼 왔다”고 지적하며, “우리는 그 결과를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이것은 감시다”라고 강조했다.
쿡은 그러면서 EU의 개인정보보호법인 GDPR를 높이 평가했다. GDPR는 지난 5월 25일부터 시행된 엄격한 개인정보보호 장치로, 역외로 개인정보 반출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경우에는 거액의 벌금을 부과한다는 내용이다. EU 역내에 자회사가 있는 모든 기업에 적용된다.
쿡은 ‘데이터 산업 단지(data industrial complex)’를 예로 들었다. 그는 “IT 기업들과 광고주들은 사람들의 ‘like와 dislike’ ‘wish와 fear’ ‘hope와 dream’ 등을 바탕으로 수십 억 달러를 거래했다”며 “이런 상황은 우리를 아주 불편하게 만들고, 우리를 불안하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개인정보 거래는 그것을 수집하는 회사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데만 기여했다”고 덧붙였다.
쿡은 “올해 여러분(EU)은 모든 사람의 권리를 보호하는데 좋은 정책과 정치적 의지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줬다”며 EU의 GDPR를 거듭 치켜세웠다. 이어 “나의 고국(미국) 등 세계 다른 나라들도 EU의 선례를 따라야 할 때”라며 “애플은 미국에서의 포괄적인 연방법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에 회의장에 있던 청중들이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세계 최대 IT 기업인 애플의 수장으로서 쿡의 이처럼 강력한 요구는 사용자의 사생활 보호권의 방어에 대한 강력한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미국은 유럽과 같은 포괄적인 정보보호법이 없다. 법률도 주(州)마다 제각각이며, 연방법은 의료 관련 정보 보호 등 특정 분야로 국한된다.
오픈라이츠그룹의 짐 킬락 이사는 BBC에 “쿡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게 놀랍다”며 “이건 평소에 사람들이 시민단체로부터나 들을 법한 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쿡이 상업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동기부여를 받았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기업들의 데이터 위반이나 데이터 오용으로 인해 대중으로부터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가운데 디지털 경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데서 나온 자성의 소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맨체스터대학의 마크 엘리엇 교수는 쿡이 그렇게까지 멀리 간 건 아니라고 지적했다. “디지털 민주주의에서 프라이버시가 완벽하게 작동한다는 의미는 개인들 자신이 정보를 통제하고 관리하며, 반대로 조직들이 접근을 요청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애플은 오랫동안 개인정보 보호에 전념해왔다. 2015년 미국 샌 버나디노 총격 사건 당시 용의자가 쓰던 스마트폰 비밀번호 해제에 협조하지 않았다가 미 연방수사국(FBI) 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당시 여론은 국가 안보냐 개인정보 보호냐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쿡 CEO는 얼마 전 인터뷰에서 “우리에게 개인정보 보호는 인권이다. 이것은 미국 고유의 시민의 권리로, 표현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와 같은 것이다. 개인정보 보호는 우리회사의 최우선 과제 ”라고 강조했다.
애플은 현재 개인정보 보호 규정 준수 책임자를 모집하고 있다. 이 자리는 애플이 세계 각국의 기존·신규 개인정보 보호 규정을 준수하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EU의 GDPR에 대한 대응도 담당한다.
WSJ는 미국 전역을 망라하는 규제가 실현되면 개인정보 보호를 강조해온 애플이 대량 정보유출 문제로 곤욕을 치르는 페이스북이나 구글 등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쿡 CEO는 “기술은 항상 사람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하는데,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대부분의 기업이 공적으로는 개인정보 보호를 지지하고 있지만 물밑에서는 정보보호 관향을 약화시키려는 로비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점을 꼬집었다.
이번 주말에는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의 동영상 연설이 예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