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은 불통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회의나 토론회 등 ‘자리’를 소통의 기준으로 본다면 박 전 대통령은 의외로 소통을 많이 했다. 다만 방식이 문제였다. 박 전 대통령이 주재한 회의에 참석했던 전·현직 관료들의 말을 들어보면, 박 전 대통령은 언제나 참석자들의 의견을 먼저 들었다. 모든 의견을 들은 뒤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의견 가진 분 계신가요?”라고 물었다. 물론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회의도 끝났다.
현 정부의 국민연금 제도개편 과정도 박 전 대통령의 소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복지부는 십수 차례 대국민 공청회를 열고, 국민연금공단 홈페이지를 통해 의견을 받았다. 그뿐이다.
모든 결정은 복지부가 했다. 정부안에 이의를 제기할 여유도 없이, 복지부는 대뜸 최종안을 냈다. 제도개편에 참여했던 전문가들조차 “이건 소통이 아니다”라고 지적할 정도로 최종안을 만드는 과정은 폐쇄적이었다. 한 전문가는 “안을 내놓지도 않고 국민에게 의견을 달라고 하면 ‘소득대체율을 높여 달라, 보험료 부담을 낮춰 달라, 사각지대를 해소해 달라’ 이상으로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냐”며 “최소한 초안이라도 내놓고 거기에 대한 의견을 들어야지, 자기들끼리 안을 만들어 발표하고 끝낼 거면 굳이 공청회를 열어 의견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고 비판했다.
국민을 상대로 불통이었다면, 언론에 대해선 ‘불신’이 심각했다. 개편안에 대한 사전 설명이나 발표 일정 공지도 없이 ‘기습’ 발표했다.
복지부에서 말하는 기습 발표의 이유는 두 가지다. 재정추계 및 제도개편 자문안 발표를 예고한 복지부가 지난달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초안 보고를 앞두고 출입기자단에 사전설명회 개최를 전제로 보도계획 확정 전 보도유예(엠바고)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게 첫 번째이고, 당시 자문안 및 초안의 일부 내용이 사전 보도돼 국민 혼란이 빚어졌다는 게 두 번째였다.
하지만 복지부의 엠바고 요청은 ‘사실과 다른 내용이 보도되면 국민 혼란이 빚어질 수 있으니 지금부터 정부안을 발표할 때까지 국민연금과 관련된 어떤 보도도 말아 달라’는 식이었다. 이런 ‘포괄적’ 또는 ‘즉시’ 엠바고는 일반적으로 국익이나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사안, 시장에 혼란을 줄 수 있는 사안, 중대한 사법·행정적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 등으로 제한된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차원에서다. 그런 점에서 복지부의 엠바고 요청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무리한 것이었다.
자문안 및 초안 내용의 유출도 과도하게 폐쇄적인 의사결정 과정에 기인했다. 피드백조차 거부하는 ‘보안 유지’는 일부 언론사의 취재 경쟁만 부추겼다.
무엇보다 복지부는 국민연금 주무부처로서 자존심을 내려놨다. 현상 유지에 가까운 개편안을 냄으로써 제도개편의 명분을 잃었고, 이마저도 취사선택이 가능한 복수안으로 제시함으로써 결정 책임을 국회에 떠넘겼다. 이럴 거라면, 처음부터 국민연금 제도개편과 관련된 모든 사안을 국회에 넘겼으면 어땠을까 싶다. 적어도 8월부터 의미 없이 허비된 4개월은 아낄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