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17일. 서초동에는 이틀째 비가 내렸다. “채무자 주식회사 한진해운에 대하여 파산을 선고한다.” 오전 9시 40분 서울지방법원 제1파산부는 국내 1위, 세계 7위 해운사의 침몰을 공식화했다. 오후가 되자 비는 멎었지만, 추위를 머금은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2년이 지났지만 한진해운 몰락의 한파는 여전하다. 국내 해운업계는 침체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특히 ‘정부의 선택을 받은’ 현대상선마저 정부 지원금으로 연명하고 있는 처지다.
◇한진해운은 왜 살아나지 못했나 = “(회생절차 개시는) 한진해운의 효율적인 회생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지 청산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다.”
2016년 9월 1일. 산업은행 등 한진해운 채권단이 “추가 자금 지원은 없다”고 못박은 지 이틀 만이자, 한진해운이 서울중앙지법에 회생절차를 신청한 지 하루 만에 법원은 회생절차 개시를 결정했다. 이례적으로 빠른 결정이다. 당시 법원은 “회생절차 내에서 공정하고 투명한 방법으로 적정 가격에 한진해운의 영업 또는 자산을 양도하는 방안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면서도 회생 가능성에 무게를 실었다.
2017년 2월 2일. 상황은 급반전됐다. 한진해운의 청산가치가 계속기업가치보다 높다고 보고받은 지 2개월 만이다. 그새 바뀐 재판장은 회생절차 폐지를 선고했다. 회생의 기로에 섰던 한진해운이 반 년 만에 파산의 길로 빠진 것이다.
한진해운이 회생에 실패한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팔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회생절차에 들어간 뒤 안팎으로 악화한 상황이 발목을 잡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들어간 회생절차다. 그만큼 기업 파산에 따른 경제·사회적 파장을 예측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시간이 부족했다. 회생절차에 들어가기 전 6조 원 규모였던 빚이 금세 30조 원까지 불어난 것이 단적인 예다.
업계에서는 한진해운 선박이 해외 항만에서 하역료를 지불하지 못해 하역이 중단되는 문제, 선박 유류비를 현금으로 지급하지 않아 연료를 공급받지 못하는 문제, 그간의 신용거래에 따른 미수금 확보를 위해 선박을 억류하는 문제 등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김태일 한국해양수산개발원 해운정책연구실장은 “이런 부분들은 이미 국내 다른 선사들이 겪었던 것”이라며 “한진해운 사태 때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문제였다”고 말했다. 정부도 우려를 했지만, 한진해운은 “별 문제 없을 것”이라고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글로벌 물류 대란이 닥쳐왔다. 세계 각국의 항만에서 입·출항 금지와 하역 거부 등의 조처를 내렸다. 회생절차에 들어간 지 6일 만에 한진해운의 비정상 운항 선박은 11척 늘었다. 전체 128척 중 절반 이상인 79척이 바다 위에 대책 없이 떠있게 된 것이다. 국내 컨테이너선 수송 능력은 회생절차 개시 3개월 만에 56%가량 줄었다.
해운동맹(얼라이언스)인 ‘CKYHE’에서 퇴출당한 것도 악재였다. CKYHE는 중국 코스코, 대만 에버그린·양밍, 일본 K라인 등으로 이뤄진 해운동맹이다. 컨테이너선박 운송 점유율은 19.4% 수준이었다. 이런 리스크를 떠안으면서까지 한진해운을 인수하려고 나서는 국내외 선사들은 없었다.
김인현 고려대 로스쿨 교수는 “정기선사는 부정기선과 다르게 수천 명의 화주와 얽혀있다”며 “그만큼 이해당사자들이 많고 복잡한 조직망이 필요해 잘 준비되지 않으면 회생하기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여전한 ‘1위’ 한진해운의 그림자 = 한진해운이 파산한 지 2년이 넘었다. 하지만 한진해운의 파산이 드리운 그림자는 여전하다. 국내 해운산업을 살리겠다는 취지로 정부가 ’해운 재건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있지만 침체의 늪은 생각보다 깊다.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국내 해운 매출액은 지난해 34조 원이다. 한진해운 사태 당시인 2016년 28조8000억 원에서 약 5조 원 증가한 수준이다. 정부의 집중 지원에 힘입어 다소간 회복세를 보인 것이다. 국적선사의 수출입 컨테이너 화물 운송량도 전년 대비 4.2% 증가했다. 시장 경쟁이 치열한 아시아 역내 컨테이너 화물 운송이 5.2% 증가했다. 아시아 역내 수출입 컨테이너 화물의 국적선사 적취율이 3.6%포인트 증가했다.
하지만 한진해운 사태 이전의 한국 해운의 위상을 되찾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지난해 실적 중 매출의 경우 2015년과 비교하면 86% 수준에 그친다. 원양 컨테이너 선복량은 절반에도 못 미치는 상황이다.
한진해운이 2016∼2017년 청산되면서 나온 컨테이너선 100척과 벌크선 44척 중 핵심 자산인 1만3000TEU급 선박 9척은 외국 해운사에 넘어갔다. 한진해운이 공들인 북미·유럽·호주 등 총 71개 노선도 국내 선사들에 넘기지 못하고 청산됐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해운재건 5개년 계획에 따라 매출·선복량·신조선 발주 등이 개선되고 있다”면서도 “업황 전망이나, 과거 호황기 실적 등을 고려하면 정상화는 아직 먼 얘기”라고 말했다.
현대상선, 16분기 연속 적자… ‘1.7兆 영구채 이자’ 암초
3조1000억 원. 지금껏 현대상선을 살리기 위해 들어간 자금 규모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영업적자의 늪에서 빠져나올 기미가 없는 상황에서, 자본잠식률까지 치솟고 있다. 1조7000억 원에 달하는 영구채 이자가 덫이 될 수도 있다..
현대상선의 올 1분기 영업손실은 1056억 원이었다. 2015년 2분기 이후 16분기 연속 적자다. 자본잠식률도 47%에 달한다. 부채비율까지 600%대로 높아졌다. 회계기준 변경에 따라 운용리스가 부채로 잡힌 영향이다.
하지만 문제는 앞으로다. 해운업황 전망 자체가 비관적인 상황이다. 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올초 948.6에서 이달 756.88까지 떨어졌다. 연료비(싱가포르 벙커씨유)도 1분기 428.7달러까지 치솟은 후 현재까지 400달러대에서 소폭의 등락만 거듭하고 있을 뿐이다.
현대상선의 지난해 사업보고서에는 유형자산 중 선박 부문에 손상차손 1620억 원이 기재됐다. 손상차손이란 특정 유형 자산의 미래 가치가 장부가격보다 현저하게 낮아질 가능성이 있는 경우 이에 해당하는 부분을 손실로 반영하는 것을 말한다. 감사를 맡은 안진회계법인 관계자는 “해운업 경기침체와 영업손실 누적 등을 고려해 컨테이너 부문과 벌크선박 등의 손상 검사를 시행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업황 개선이 요원한 상황에서 정부가 하반기 추가 지원을 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현대상선은 적자가 하반기까지 이어질 경우 자본잠식률이 50%를 넘길 가능성이 있다. 관리종목에 지정될 수 있는 상황이다. 올해 만기인 2865억 원의 회사채도 골칫거리다.
일각에서는 업황 부진이 이어지는 중에 현대상선의 영구채가 나중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현대상선은 24일 1000억 원 규모의 영구채를 발행했다. 최대주주인 산업은행(13.05%)과 2대주주인 한국해양진흥공사(4.42%)가 각각 500억 원씩 인수했다. 현대상선은 이번 발행을 포함해 5차례에 걸쳐 총 1조7200억 원 규모의 영구채를 발행한 상태다. 문제는 ‘스텝 업’ 조항이다. 스텝 업이란 일정 기간이 지난 시점부터 이자율을 높이는 것을 말한다. 상환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
실제로 2012년 발행했던 영구채의 경우 이자율이 당시 7.05%였던 것에서 현재 9.84%로 늘어난 상황이다. 2017년 발행한 6000억 원 영구채는 2022년부터, 지난해와 올해 각각 발행한 1조 원, 1000억 원의 영구채는 각각 2023년, 2024년부터 금리가 두 배로 오른다. 그때까지 영구채를 갚지 못한다면, 단순 계산해도 매년 1000억 원을 훌쩍 넘기는 이자비용을 지출하게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