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우리는 모든 나라가 ‘명분’을 내팽개치고 국가 이익만을 앞세우는 새로운 세계를 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최우선주의(America First)가 그러하고,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Brexit)나 일본 아베 총리의 보수화 경향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경제 분야에서 보면 지금까지 세계를 유지하던 명분은 ‘자유무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록 개별 국가의 특수한 여건에 따라 자유무역의 정신에 반하는 조치를 하더라도 그것은 말 그대로 ‘예외’임을 인정하였고, 자국의 이익을 위한 정당한 일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정치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로 특정 교역 상대국에 대한 무역 보복 조치, 수출 여건 강화 조치를 하면서도 모두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세계무역기구(WTO)는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고 국가 간 분쟁이 발생해도 중재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세계는 이미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미국은 앞장서서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가고 있다.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미·중 무역 분쟁, 중동지역에서의 불간섭 정책, 한국을 비롯한 정치적으로 밀접한 국가들에 대한 경제적 압박 등이 트럼프 행정부가 이러한 세계 질서의 변화를 선도하고 있는 두드러진 현상이다. 에너지 부문으로 좁혀서 바라보면 이러한 변화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미국은 셰일혁명을 통하여 다른 나라의 에너지 공급에 흔들리지 않는 미국의 에너지 독립(Energy Independence)을 이루어냈다. 이제 미국은 에너지 독립을 넘어 에너지를 이용하여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에너지 패권(Energy Dominance)을 말하고 있다. 2018년 트럼프 행정부는 에너지 패권이라는 목표하에 6대 에너지 정책을 발표한 바 있다. 여섯 개의 정책 중 원자력 재도약(Nuclear Revitalization)을 제외한 다섯 가지는 화석 연료인 석유, 가스, 석탄을 미국의 국내외에서 개발하거나 해외에 수출하는 내용이다. 기후변화 대응보다는 에너지 안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세계에너지기구(IEA)는 2025년이 되면 세계 석유 수요를 감당할 만한 공급 능력의 여유가 없다고 본다. 지난 10여 년간 상대적으로 낮은 유가와 셰일 혁명의 진행으로 새로운 유전개발의 경제성이 떨어지고, 자원개발에 대한 투자는 감소해왔다. 이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전통적 석유(Conventional Oil)의 공급 능력은 정체되었다. 기존에 생산되는 광구의 원유 생산량은 점점 줄고 있고, 신규로 개발 허가를 받은 광구의 공급 능력도 제한적이다. 반면 수요는 중국 등 개도국을 중심으로 꾸준히 늘어갈 전망이다.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IEA는 2025년 석유 수요의 20% 가까운 물량이 미국 셰일로 공급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불안한 시장 상황에서 미국 셰일의 중요성은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에너지 패권을 외치는 미국이 이렇게 불안정한 석유 시장에 어떻게 대응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는 자국 최우선주의로 회귀하는 미국과 그러한 미국의 셰일에 의존해야 하는 세계 에너지 시장을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제3의 석유 충격(Oil Shock)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누구도 자신할 수가 없다. 90% 이상의 에너지를 해외에 의존해야 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괜찮은가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는 왠지 뒷골이 서늘한 느낌이 든다. 문제의 해법을 찾는 일은 위기를 느끼는 데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