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SUV가 인기를 끌기 전인 2013년, 한국지엠(GM)은 전에 없던 B 세그먼트(소형) SUV '트랙스'를 선보였다.
이후 쌍용차는 티볼리, 현대기아차는 코나, 스토릭, 베뉴, 셀토스를 연이어 내놓으며 B 세그먼트 SUV 시장의 경쟁은 치열해졌다. 트랙스와 이쿼녹스만 가진 한국지엠은 시장을 주도하진 못했다. 새로운 차종이 필요했다.
한국지엠의 선택은 트레일블레이저였다.
회사 측은 트레일블레이저가 기존에 없던 새로운 세그먼트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덩치를 보면 소형과 중형 그 중간쯤으로 보인다.
트레일블레이저의 앞뒤 길이(전장)는 4410㎜로 셀토스(4375㎜)보다 35㎜ 길고, 중형 SUV인 현대차 투싼(4475㎜)보단 65㎜ 짧다. 너비(전폭)와 높이(전고)는 각각 1810㎜, 1635㎜로 이 역시 셀토스와 투싼 사이에 있다.
외관은 전체적으로 날렵함이 살아있다. 전면부는 쉐보레의 패밀리룩 듀얼 포트 그릴이 큼직하게 자리했고, 볼륨감 있는 보디라인이 후면까지 이어진다.
시승한 차는 스포츠카 느낌을 살린 RS 모델이다. 전면부 그릴의 포인트 레터링과 블랙 보타이, D컷 스티어링 휠 등 전용 디자인 요소를 통해 모델만의 특성을 더한다.
실내는 여유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동반석에서 다리를 쭉 뻗을 수 있을 정도고, 뒷좌석에 앉아도 레그룸(무릎과 시트 사이)이 넉넉하다. 뒤쪽으로 갈수록 지붕이 다소 낮아지지만, 주먹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헤드룸(머리와 지붕 사이)은 있다.
RS 사륜구동 모델은 1.35리터 가솔린 E-터보 엔진을 얹어 최고출력 156마력(PS), 최대토크 24.1kg.m의 힘을 낸다. E-터보는 GM의 라이트사이징 기술로 제작한 3기통 엔진으로 중형 세단 말리부에도 적용된 바 있다. 리터당 11.6㎞의 연비를 낸다. 변속기로는 9단 자동변속기가 맞물린다.
가속력은 훌륭하다. 시속 60㎞부터 100㎞ 사이를 부드럽게 오르내린다. 가속 페달을 밟으면 멈칫하는 순간 없이 순식간에 힘을 낸다. 브레이크는 묵직하다. 조금만 밟아도 제동이 걸린다.
특히 핸들링이 인상적이다. 속도가 제법 붙은 상태에서 회전해도 차체가 바닥에 낮게 깔리며 안정적으로 몸을 튼다. 전고가 있음에도 차체가 휘청거리지 않는다.
고속도로에 접어들어 속도를 더 내봐도 트레일블레이저는 힘겨워하지 않는다. 스포츠 모드를 굳이 설정하지 않아도 무리없이 시속 100㎞ 이상으로 가속됐다.
이 차는 스위처블 AWD 시스템을 갖췄다. 버튼을 눌러 사륜구동 모드로 전환하자 가속 시 밀어주는 힘이 더 강해진다.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ACC) 기능도 만족스럽다. 앞차와의 간격에 따라 부드럽게 가속과 감속을 해낸다. 차선 내부의 중심을 따라가는 방식은 아니라 스티어링 휠에 손은 자주 얹어야 한다.
단, 트레일블레이저가 갖춘 ACC는 카메라 기반이다. 날씨가 흐리거나 카메라의 인식 성능이 떨어질 수 있는 환경에서도 적절히 작동하는지도 관건이 될 듯하다.
차선 이탈 경고ㆍ차선 유지 보조 시스템, 전방충돌 경고 시스템 등 모든 트림에 기본 적용한 안전 시스템도 주행을 돕는다.
실내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버튼 배열이다. 비상등 버튼은 동반석에 더 가깝게 자리했고, 스티어링 휠 열선 버튼은 동반석 공조 장치 다이얼에 있다. 백라이트 방식이라 눈에 쉽게 들어오지도 않는다. 재배열이 필요해 보인다.
짐을 들고 있어도 킥 모션만으로 트렁크를 열 수 있는 핸즈프리 파워 리프트게이트, 스마트폰 무선충전, 애플 카플레이, 스카이풀 파노라마 선루프 등의 편의사양은 경쟁 차종에 꿇리지 않는다.
판매가격은 기본 트림 LS가 1995만 원, 최상위 트림 RS가 2620만 원이다. 주행 성능과 가격대를 놓고 보면 경쟁 차종이 긴장할 만하다.
잘 달리고 잘 멈추는 건 자동차의 기본이다. 트레일블레이저는 기본기에 충실한 차다. '개척자'라는 뜻의 이름처럼 소형과 중형 SUV를 아우르는 시장의 개척자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