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 것은 북방의 사자, 스웨덴의 구스타브 아돌프 국왕의 참전이었다. 그는 구교의 주력을 형성하던 스페인 군대에 맞서 혁신적인 전술을 들고나옴으로써, 전쟁의 추를 바꿔 놓았다. 참고로 당시 스웨덴의 병력은 총 4만5000명에 불과해, 스페인의 30만 명 그리고 프랑스의 15만 명에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규모였다. 스웨덴의 병력이 적었던 것은 북쪽에 위치해 기후가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아 인구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사학자들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1600년 스웨덴의 인구는 단 76만 명으로, 프랑스(1850만 명)와 스페인(824만 명)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스웨덴이 적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승패를 바꿔 놓을 수 있었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네덜란드의 군사혁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물론, 새로운 무기를 채용한 데 있었다. 참고로 네덜란드의 군사혁신이란, 독립전쟁의 지도자 마우리츠가 개발한 선형진(線型陣, line infantry)을 지칭한다. 선형진이란, 분대에서 소대 중대로 이어지는 현대적인 부대 단위를 처음으로 만들어 지휘관의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사각형의 방진이 아닌 선형으로 병력을 배치해 머스킷 총병 부대가 끊임없이 사격을 가할 수 있도록 배치한 것을 뜻한다. 선형진 덕분에 네덜란드는 독립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지만, 선형진에도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사선진의 가장 기본적인 운용 방식이 발사한 머스킷 총병이 열의 제일 뒤로 이동해 다시 사격을 준비하는 것이었기에, 방어에 적합한 전술이라는 점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스웨덴의 아돌프 국왕이었다. 그는 마우리츠의 전술에 자국의 환경을 적절히 조합했다. 스웨덴은 16세에서 60세에 이르는 남성 전원을 의무적으로 복무시키는 국민개병제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이는 스웨덴이 덴마크와 폴란드 등 주변 국가와 전쟁상태에 있었던 데다 서유럽과 달리 봉건제의 전통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유럽 최초의 국민군을 만들어 낸 데 이어, 그는 대포의 경량화라는 두 번째 혁신에 성공했다.
당시 대포는 성을 공격할 때에나 중요했지, 벌판에서 벌어지는 전투에서는 그 중요성이 높지 않았다. 대포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이유는 바로 가볍고 견고한 청동 대포를 만드는 데 많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청동의 주원료인 주석의 산지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청동 대포는 대단히 비쌌다. 물론 철제 대포가 있지만, 초창기의 철제 대포는 아주 비효율적이었다. 일단 대포 발사 중에 포신이 터지면 큰일 날 것이기에 최대한 대포를 크게 만들어야 했기에 대단히 무거웠고, 또 부식이 잘되기에 내구성 면에서도 청동 대포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대포가 서유럽에 도입된 것은 상당히 오래된 일이었지만, 전쟁의 주역으로 올라서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이런 가운데 16세기 후반, 영국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철제 대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당시는 영국에서 생산된 철제 대포의 품질이 좋은 이유를 몰랐지만, 이후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영국 서식스 지역의 광산에서 채굴된 철광석 안에 인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 대포의 내구성과 효율성을 향상한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서식스 지역의 장인들이 오늘날 제철 공정에서 여전히 적용되는 기본 규칙들을 제한적으로나마 이해하고 적용했던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 기본 규칙이란 인을 함유한 특정 갈철석을 활용하여 생산하되, 유황이 함유된 철광석을 최대한 배제하는 한편 담금질을 하지 않고 천천히 냉각시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영국산 철제 대포의 놀라운 성능에 놀란 각국의 정부는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지만, 가장 먼저 영국의 대포 기술을 습득해 더 뛰어난 대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은 스웨덴이었다. 당시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브 아돌프는 서른여섯 살로 ‘30년 전쟁’에 참전하기 전, 1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스웨덴의 군사제도를 완비한 것은 물론 재정을 안정시키고, 사법 행정을 중앙화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그는 통상을 장려하고 광물을 비롯한 스웨덴의 천연자원을 개발하는 데 열심이었다. 여기에 스웨덴은 지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영국과 가까워 영국의 대포 장인을 스카우트하기도 쉬웠기에 1629년, 혁신적인 경량 대포 ‘레예멘츠스튀케(Regementsstycke)’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이 대포는 3파운드, 즉 123㎏에 불과하므로 기동성이 뛰어나면서도 화승총 사수가 한 발 쏘는 동안 무려 세 발을 발사할 수 있을 정도로 조작이 쉽다는 점이 최대의 장점이었다. 특히 스웨덴의 국왕이었던 구스타브 아돌프는 대포의 바퀴와 수레 및 포탄을 규격화했고, 규격에 따라 포탄을 나무상자에 포장함으로써 대포를 쏠 때 일일이 화약을 개량할 필요 없이 포장된 포탄을 뜯어 바로 사용할 수 있어 화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마우리츠의 선형진에 새로운 대포가 가세하니, 스웨덴군은 당시 유럽의 어떤 군대보다 강한 전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30년 전쟁에 참전한 스웨덴군의 병력은 총 1만3000명에 불과했지만, 기병과 포병 위주로 구성된 스웨덴 병사는 잘 훈련된 강병이었다. 라이프치히 전투(1631년 9월 7일)에서 스웨덴군은 신교의 작센군과 연합해, 약 3만6000명의 황제군(스페인-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군)에 맞섰다. 숫자는 두 진영이 비슷했지만, 황제군의 병력 대부분이 전투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으로 채워져 있었기에 압도적인 황제군의 우위가 예상되었다. 전투 초반 작센군이 순식간에 무너지며 스웨덴군이 포위될 상황에 놓이기도 했지만, 이때 새로운 전술이 위력을 발휘했다. 머스킷 총병과 대포의 연속 사격으로 황제군의 기병 진격을 무산시켰고, 이어 스웨덴 기병이 어지러워진 황제군의 진영을 돌파하면서 승패를 갈랐다. 물론 이 전투로 ‘30년 전쟁’의 승패가 갈린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스웨덴은 약소국가였기에, 전쟁에서 구스타브 아돌프가 주도권을 쥘 수 없었다. 더 나아가 1632년 벌어진 뤼첸 전투에서 또다시 황제군의 주력부대를 쳐부수는 데 성공했지만, 구스타브 아돌프가 적진으로 돌격했다가 전사함으로써 전쟁은 다시 불승불패의 국면으로 흘러갔기 때문이었다.
이상과 같은 구스타브 아돌프의 경험은 크게 두 가지의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 번째는 ‘군사적 혁신’은 절박한 나라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네덜란드의 선형진, 그리고 스웨덴의 레예멘츠스튀케 등 다양한 혁신은 상대적으로 전력이 열세에 처해 있는 나라에 의해 이뤄지고 또 채용되었던 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제력이 지속하지 않을 때, 군사적인 우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불운이 겹치기는 했지만, 구스타브 사망 이후 스웨덴의 군사적인 우위가 사라진 것, 그리고 30년 전쟁 이후 네덜란드가 점점 패권 국가의 지위를 잃어버린 것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결국, 인구와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나라들은 일시적인 우위를 점할 수는 있으나 장기적으로 혁신을 지속하고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많은 행운이 뒤따라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