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디자이너(요즘은 '스타일러'라고 부른다)는 본능적으로 빈 자리를 그냥 두지 않는다.
요즘 신차 소개자료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여백의 미(美)’. 자동차 디자이너는 멋진 선을 그려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간을 남겨두는 일’이다.
차 측면 윈도와 보디 사이의 경계선은 ‘벨트라인’이다. 도어 표면을 가로지르는 독특한 선은 이른바 ‘캐릭터 라인’이라고 부른다.
요즘은 사라졌지만, 한때 도어 중앙을 가로지르는 두툼한 플라스틱을 ‘도어 몰딩’이라고 불렀다.
국산차 기준 2000년대 후반까지 대부분의 승용 세단이나 SUV는 차 도어 중간에 두터운 ‘몰딩’을 달았다.
1960년대 유행을 시작한 도어 몰딩은 차 옆면을 지키는 하나의 ‘보호대’였다.
고급차일수록 몰딩이 두툼했고, 크롬 장식도 넉넉하게 덧댔다. 혹시나 다른 차가 내 차의 옆구리에 상처를 낼까 우려해 내 차를 보호하겠다는 의지도 가득 담겨있다.
이런 ‘도어 사이드 몰딩’은 철판 안쪽에 숨겨놓은 충격 보호 장치 ‘임팩트 빔’과 연결된다. 커다란 철판(도어 표면) 중간에 고정 포인트가 있으니 당연히 철판 모양도 단단하게 유지할 수 있다.
1990년대 들어 자동차 강판 기술이 발달하면서 점진적으로 이런 도어 몰딩이 사라졌다. 몰딩을 덧대지 않아도 풍만한 도어 옆면을 오롯하게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현대차 기준 2005년 등장한 NF쏘나타(그랜저TG)까지 이런 몰딩이 존재했다. 이후 YF쏘나타(그랜저HG)부터 몰딩이 사라졌다.
이후 이런 도어 몰딩이 담당했던 도어 강성은 자동차의 캐릭터 라인이 대신하고 있다.
최근 등장하는 신차는 대부분 도어 옆면에 여러 가닥의 캐릭터 라인이 있다.
이들은 단순히 자동차의 디자인 이외에 보디 강성을 유지하는 역할도 해낸다. 도어 몰딩이 사라진 이후 도어 윗면, 또는 아랫면에 날카로운 선이 들어간 것도 이런 이유다.
예컨대 두꺼운 도화지 여러 장을 겹친 뒤 양옆에서 힘을 주면 가볍게 구부러진다. 그러나 여러 장의 도화지 중앙을 가로로 반듯하게 접어놓으면 사정이 달라진다. 양옆에서 힘을 줘도 쉽게 접히지 않는다. 도어 옆면의 강성은 이런 원리를 이용한 셈이다.
압흔이란 일종의 부종(浮腫)을 뜻하는 의학 용어다. 피부가 부풀어 오른 자리를 손가락으로 누르면 눌린 자리가 원상태로 돌아가지 않고 한동안 그대로 남아있기도 한다. 혈액 순환 장애 때 이런 현상이 생긴다. 한 마디로 ‘눌린 흔적’이다.
기계공학이나 냉연공학에서 압흔 강성은 ‘일정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철판이 그 원형 상태를 유지하려는 힘’을 뜻한다.
자동차 도어 철판을 손가락을 살짝살짝 눌러보면, 철판은 ‘울룩불룩’ 움직인다. 그러면서도 원래 위치로 다시 돌아온다. 얇은 도어철판이 원형으로 돌아오는 이유는 도어 철판의 이런 강성 덕이다.
공기를 채워 넣은 듯 빵빵하게 부풀린 자동차 도어가 애초 모양을 고스란히 유지하는 것도 압흔 강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자동차용 냉연강판의 성능이 좋아졌고 철강기술도 발달해 몰딩 없이 도어 강성을 유지할 수 있다.
못생긴 몰딩 대신, 두꺼운 캐릭터 라인을 하나 그어주면 ‘압흔 강성’이 크게 확대된다. 물론 디자인도 한결 세련미를 얻는다.
25년 전, 우리에게는 요즘처럼 도어강성을 유지할 프레스 기술이나 냉연강판 기술이 없었다. 그런데 겁도 없이 ‘도어 사이드 몰딩’을 과감하게 걷어낸 차도 있었다.
콘셉트카 디자인을 고스란히 가져오다 보니 당시 기준으로 멋진 쿠페가 나왔지만, 도어 강성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런 시행착오 덕에 오늘날 우리는 훌륭한 보디 강성을 지닌 신차를 만날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