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제약 자국화’를 향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원료의약품 자급률이 20%도 안 되는 탓에 팬데믹 상황 속에서 해외 생산시설에 문제가 생기면 필요한 백신이나 치료제뿐 아니라 일상에서 쓰는 필수의약품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할 우려가 있다.
29일 한국제약바이오협회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우리나라 완제의약품의 자급률은 74% 수준이고, 원료의약품의 자급률은 16%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원료의약품은 완제의약품의 기초가 되는 만큼 원료의약품의 자급률을 높여야 ‘제약 자국화’를 달성할 수 있는데 국내 원료의약품의 자급률이 크게 낮아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에 의약품 수출 제한 등의 우려가 컸다.
협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중국, 인도,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에서 원료의약품을 수입하는데 특히 중국에서 원료의약품을 수입하는 비중은 2019년 기준 36.7%로 가장 높았고, 인도는 10.2%로 그 뒤를 이었다.
중국과 인도는 원료가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해 세계의 원료의약품 생산 공장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중국은 일부 의약품의 수출을 제한했고, 인도 역시 코로나19로 원료 수급이 어렵다는 이유로 의약품 주성분 26종의 수출을 막았다. 그러자 전 세계 의약품 시장에서 원료의약품 가격은 10% 이상 상승했고, 특정 원료 가격 또한 50% 이상 높아졌다.
문제는 의약품 공급이 중단되는 사례가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뿐 아니라 여러 생산 문제에 의해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2019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따르면 의약품 공급 중단 원인 중 제품이나 제조시설의 품질 관리 문제가 37%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제조시설의 가동 역량이 부족해 다른 제품을 생산하는 동안 해당 제품을 생산하지 못하는 문제가 27%로 그 뒤를 이었다. 이 외에 원료 생산시설이 2개 미만이거나 해외 시설에 의존해 원료 공급이 불안정해진 경우가 27%, 갑작스러운 수요 증가 5% 등이 의약품 공급 중단 원인으로 꼽혔다.
의약품 공급 중단 배경 뒤에는 경제적 요인이 자리 잡고 있다. 공급 중단이 흔히 발생하는 의약품은 주로 제네릭(복제약) 의약품으로, 출시된 지 오래돼 가격이 낮거나 제조사가 한두 개로 적은 경우가 많다. 제약바이오협회 측 관계자는 “의약품 판매 후 기대할 수 있는 수익이 낮아질 때 기업이 그 제품의 판매, 공급을 유지할 동기는 약해진다”라며 “출시된 지 오래된 제네릭 의약품의 경우 약가 경쟁이 심해지면서 가격이 점점 낮아질 때 공급 중단 가능성이 커진다”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세계 각국에서는 원료의약품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한 움직임에 나섰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2월 의약품 등 주요산업의 공급망을 강화하기 위해 행정명령을 내렸고 필수의약품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한 대책 마련을 시작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자국 제약사 사노피를 방문해 주요 의약품에 대한 투자 등 리쇼어링 정책을 발표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의약품 자급률을 높이고 ‘제약 자국화’를 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제약바이오협회는 정부가 수입 대체 원료의약품을 제조하는 업체에 대해 기초ㆍ원천 연구부터 상용화까지 전 주기 지원책을 마련할 것을 추진 중이고, 국산 원료의약품 개발 업체에 대한 세제 지원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약바이오협회 관계자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한국은 선진국 수준의 의약품 개발 및 탄탄한 생산 인프라를 갖춰 외국과 달리 의약품 부족 현상에서 자유로웠지만, 2000여 개의 원료 성분 중 국산화가 시급한 성분 200여 개를 선정해 5년 후 원료의약품 자급률을 50%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도록 집중 육성 추진이 필요하다”라며 “국산 원료를 사용한 의약품에 약가 우대 및 사용 촉진, 국산 원료 사용 의약품 허가 신청 시 신속심사 적용, 생산설비 구축 지원, 세제 혜택 등 다양한 정책 수립으로 원료의약품 생산을 독려하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