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김정희원 교수는 최근 출간된 책 ‘공정 이후의 세계’에서 이같이 말했다. 공정(公正)은 몇 년전부터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를 관통하는 단어였다. ‘공평하고 올바름’이라는 뜻의 이 단어는 갖가지 이유로 삶의 기회와 존재의 자격을 박탈당한 청년 세대들이 추구하는 가치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 교수는 이 공정이라는 가치가 능력주의와 만나 우리 사회의 차별과 혐오를 조장한다고 분석한다. 그는 “세상이 공정을 들이밀 때, 이제 다른 질문으로 되받아치자”며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차별하거나 무시하게 만들고, 승자와 낙오자에게 보란 듯이 번호표를 붙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속삭이는 우리 머릿속의 그림자를 걷어내자”고 역설한다.
우선 김 교수는 “능력주의는 허구”라고 말한다. 그는 “능력은 순수하지 않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능력’의 개념은 진공관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가부장제, 이성애중심주의, 인종주의와 같은 지배 논리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오직 ‘능력’과 ‘시험’으로 환원되는 공정의 가치가 약자들의 삶을 더욱 척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 중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소수자 배려 정책인 ‘할당제’다. 특히 여성 할당제가 그렇다. 여성 할당제 폐지는 윤석열 정부의 대선 공약이었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 역시 기자들을 만나 여성 직원 비율을 기업에 기계적으로 할당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공정의 가치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어떤 분야에서든 적극적인 소수자 배려 정책이 필수적”이라고 꼬집는다. 그는 “여성, 저소득층, 비수도권 지역이 과소 대표된 영역이 있다면 할당제와 같은 수정 조치가 도입되어야 차별과 불평등을 조금이라고 해소할 수 있다”며 “차별과 불평등을 발본적으로 깨뜨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 방안으로 김 교수는 ‘인정의 재분배’를 주장한다. 그는 “소수자 배려 정책은 사회 약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자원은 재분배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사회적 인정의 획득은 오히려 어렵게 한다”고 지적한다. 지역균형선발 전형으로 명문대에 진학한 학생을 다른 학생이 ‘지균충’이라는 혐오의 표현으로 부르는 게 그 예다.
이처럼 김 교수는 할당제로 대학이나 기업에 들어온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시선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또 다른 피해를 준다고 비판하며 인정의 재분배에 더욱 전폭적인 힘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스스로 ‘부와 인정의 주변부’에 놓여 있다고 느끼는 이들이 존재하는 한 불공정하다는 외침도, 타자와의 차별화 전략도, 혐오와 무시의 레토릭도 계속 반복될 것”이라며 “지금처럼 단편적이고 획일적인 기준으로 사람들의 지위가 매겨지고 인정이 배분되는 사회가 아닌, 다원적 가치와 기회를 추구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