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텔레시스는 지난 6월 820억 원을 받고 경기 성남 판교연구소를 의약품 제조사 제테마에 팔았다. SK스퀘어는 7월 바이오 기업 나노엔텍 지분 760만 주를 한 국내 사모펀드에 580억 원에 넘겼다. 한화그룹 자동화설비 계열사인 에스아이티는 10월 서울 종로 소격동 일대 빌딩 네 채를 250억 원에 매각하기로 했다.
미국발 긴축 공포에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이 동시에 패닉에 빠지면서 국내외 기업들도 자금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기업들은 앞으로 경영 환경이 더 어려워질 것으로 판단하고 팔 수 있는 자산은 닥치는 대로 팔아치워 현금화에 나서는 모습이다. 국내 기업들을 둘러싼 신용 위험 우려도 커지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해온 기업들은 미국의 긴축발 경기 침체 우려로 수익성이 흔들고 있다.
12일 본지가 올해 반기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매출 상위 10대 기업(금융사 및 공기업 제외)이 올해 들어 상반기까지 늘린 현금 및 현금성 자산(단기금융상품 포함, 연결재무제표 기준)은 21조3100억 원이다. 총자산은 작년 말보다 10.3% 늘어난 227조9700억 원이다.
재계 1위인 삼성전자가 124조 원으로 현금성 자산이 가장 많았다. 삼성전자의 2분기 말 현금성 자산은 작년 말 120조7400억 원보다 3조2700억 원(2.7%) 늘었다. 단기금융상품 장부금액이 2조7200억 원가량 증가한 영향이 컸다.
매출 2위인 현대차의 현금성 자산은 17.8% 늘어난 23조2600억 원이었다. 현대차는 2020년부터 2년 연속 2조 원 이상을 현대차증권이 발행한 MMT(Money Market Trust)에 투자하며 유동성을 늘려가고 있다. 올해는 1조3050억 원을 투자했다. 기아는 16조700억 원에서 14.4% 증가한 18조3800억 원으로, 현대기아차의 현금성 자산은 41조6400억 원으로 집계됐다.
작년 말 대비 현금성 자산이 가장 많이 늘어난 곳은 HD현대였다. HD현대는 5조 원 늘어난 7조4000억 원 규모의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올 상반기에 한국조선해양이 종속회사로 편입되며 현금성 자산이 크게 증가한 덕분이다. 이어 SK는 3조8500억 원(20.9%) 늘어난 22조2900억 원을, SK이노베이션은 3조5900억 원(48.4%) 증가한 11조 원 규모의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밖에 포스코홀딩스(5조7800억 원), LG전자(5조6200억 원), 한화(5조2700억 원), SK하이닉스(4조9700억 원) 등의 기업이 5조 원 안팎의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부동산 등 자산을 팔아 유동성 확보에 나산 곳도 있다.
한진칼의 종속회사인 칼호텔네트워크는 차입금 상환 등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제주KAL호텔을 950억 원에 처분했고, 대한항공은 서울 종로 송현동 필지를 5579억 원에 매각했다. 만도는 현금 유동성 확보를 이유로 판교 R&D센터를 4000억 원에 팔았고, LX하우시스는 자산효율화 차원에서 울산 토지·건물을 매각했다.
LG는 자회사 디앤오가 보유한 농업법인 곤지암예원 지분 90%를 계열사 LG생활건강에 지난달 매각했다.
금리가 더 오르기 전에 비싼 이자를 주고 회사채를 발행하는 곳도 늘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신용 등급 AA- 회사채 3년물 금리’는 올 초 2%대였지만 8일엔 4.668%를 넘었다. 신용 등급 BBB- 3년물 금리는 10%를 웃돈다.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가 500대 기업 가운데 반기보고서를 낸 187개 기업을 대상으로 직접금융 자금조달 현황을 조사한 결과 올해 상반기 회사채·기업어음(CP)·단기사채 등 직접금융 자금조달액은 작년 대비 59조5881억 원(68.7%) 증가한 146조374억 원이나 됐다.
현대경제연구원은 “3분기 이후 미약한 경기 회복 또는 횡보 국면이 이어지는 ‘저성장’이 예상된다”며 “여전히 국내외 시장 상황에 불확실성이 높기 때문에 (기업들의) 투자 비용 급증이라는 하방 리스크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