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의 주거사다리가 부러질 위기에 처해 있다.
‘빌라왕’ 등으로 불리는 사기꾼들이 전세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전방위적 피해를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기꾼들은 인천이나 서울 강서구 화곡동 등 집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해 서민이나 사회초년생들이 많은 지역을 주요 활동 무대로 삼았다.
또한 사기 의도가 없었지만 다수의 주택을 구입해 임대료를 굴리던 일부 투자자들의 경우에도 집값이 갑자기 하락하면서 집값보다 전세가가 비싸지는 역전세난으로 피해자가 발생하고 있다.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정부와 국회는 이례적으로 특별법까지 만들며 피해자 구제에 나서고 있다. 또한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 달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전세제도는 수명을 다했다”고 언급했다. 전세 사기 사태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자 전세시대 종말을 예고한 것이다.
전세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임대차 방식으로 꼽힌다. 일정 금액의 돈을 집주인에게 맡기면 일정 기간 동안 따로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거주할 수 있는 방식이다.
전세가 제도로 자리잡은 건 1970년대로 추정된다. 급격한 산업화로 한 해 평균 35만 명이 서울로 몰렸지만 새집 공급은 턱없이 부족했고, 결국 집값이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산업화로 정부와 은행은 기업에 빌려줄 돈도 부족했던 시기였던 만큼 개인이 대출을 받기란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었다. 이로 인해 전세 시장이 급격히 커졌다.
집주인은 전세 보증금을 받아 투자를 하거나 집을 구입해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었고, 세입자는 안정된 거주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슈가 있을 때마다 전셋값은 요동쳤고, 노태우 정부에서는 세입자 보호를 위해 전세 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늘렸다. 기간을 늘리자 집주인들은 전셋값을 앞당겨 올렸다. 때문에 1989년 전셋값은 29.6%, 이듬해인 1990년에 23.7%라는 유례없는 폭등을 겪어야 했다. 이에 전셋값 급등을 비관해 무려 17명의 세입자가 자살하며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1998년 외환위기 때 전세는 또다시 사회문제가 됐다. 전셋값이 급락해 세입자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역전세난이 발생한 것이다. 많은 사회적 비용을 치른 후 2004년에는 한국주택금융공사를 출범시키고 전세자금대출 보증에 나섰고, 2005년부터는 은행들이 전세대출을 다루게 됐다.
2020년에는 ‘임대차 3법’이 전세제도의 문제를 부각시킨 도화선이 됐다. 문재인 정부는 세입자 보호를 내세워 전세 계약 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고 전세대출 한도를 집값의 100%로 확대했다. 집주인들은 어김없이 전셋값을 올렸고, 세입자들은 오른 전셋값을 대출로 충당했다.
집값이 또 하락세로 접어들자 역전세난을 피하지 못했고 보증보험을 이용한 사기까지 활개를 치면서 전세제도의 존폐를 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다.
문제는 아직도 전세 피해가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이고, 나아가 ‘예방’은 없이 ‘수습’만 논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전세 사기의 대표적 방법 중 하나인 ‘대출 먹튀’는 여전히 대처 방법이 전무하다.
세입자와 집주인의 정보 비대칭을 해결하겠다고 다양한 방법이 나왔지만 지금도 세입자는 계약금을 낸 이후 잔금을 치를 때까지 집주인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안전장치 중 하나인 보증보험도 전입신고일 이후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빌라가 아파트에 비해 시세 확인이 어렵다는 점 역시 뾰족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내놓는 전세사기 대책을 두고 피해자들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며 분통을 터트리는 이유다.
문제가 커진다고 전세제도의 ‘폐지’를 논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얼마 안되는 종잣돈을 월세로 소진시키는 건 서민들 주거의 질을 낮출 뿐이다. 실제로 2020년 기준 국민의 15.5%가량이 전세를 이용해 거주하고 있다.
전세는 죄가 없다. 전세를 대신할 주거사다리를 만들지 못한 채 전세를 없앤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이제는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논해야 한다. 그 초점은 주거사다리의 대안, 피해자 구제, 선의의 임대인을 구제하는 방안들에 맞춰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