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에도 똑같은 말을 한 이가 있다. 유시열 전 은행연합회장. 그는 2000년대 초반 퇴임 기자 간담회에서 “은행의 ‘나만 살자’는 아생주의(我生主義) 풍토는 바뀌어야 한다”라며 이익만을 좇는 영업 태도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아생주의’는 은행 지원이 있으면 살 수 있는 기업인데도 은행이 발을 빼려는 영업행태를 일컫는다.
20여년이 흘렀지만, 은행의 야생주의 경향은 지금 더 심해진 것 같다. 그런 영업 덕(?)인지 은행은 1분기에만 7조 원 규모의 순이익을 냈다. 전 분기보다 2조5000억 원(55.9%) 늘어났다. 이자이익은 14조7000억 원에 달했다.
중소기업이나 서민들 시각은 곱지 않다. 매달 어렵게 낸 이자로 은행만 살찌우는 것은 아닌지. 중소기업은 분통이 터진다. 은행은 겉으로 중소기업에 자금지원 확대를 외치면서 뒤로는 빌려준 돈을 회수하기 바쁘다. 신용도가 낮은 중소기업한테 금리를 올려 이익을 더 챙기고 있다.
K 은행과 거래한 A 기업은 경영 내용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데 지난해 수수료나 이자를 전년도보다 1억5000만 원을 더 냈다고 한다. 중소기업 전반이 그렇다. 중소기업중앙회, 소상공인연합회 등 중소기업 단체 16곳이 회원사 300곳을 조사한 결과, 작년 한 해 중소기업·소상공인들이 부담하는 평균 대출 금리가 연 2.93%에서 5.65%로 2.72%포인트 올랐다. 은행들이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폭 2.25%포인트보다 대출 금리를 더 많이 올린 셈이다. 은행권 전체가 지나친 ‘떠넘기기’ 영업을 한다는 지적이 많다.
올해 들어 이런 분위기는 더 짙어졌다. 5대 시중은행의 중소기업 최다 차주등급(BBB)의 일반기업대출 평균 취급 금리(1분기 말 기준)는 7.472%에 달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0.762%포인트 늘었다.10억 원을 빌렸다면 1년 이자로 7472만 원을 내는 셈이다.
그래도 돈 빌릴 곳이 있는 기업들은 형편이 낫다. 부실 소지가 있는 중소기업 대출은 아예 외면하고 있다. 위험 관리능력이 취약한 국내 은행들이 돈 되는 안전한 물건만 찾는 것은 아닐까. 은행의 자금중개 기능은 크게 위축됐다.
국내 상장사 다섯 곳 가운데 한 곳은 영업 활동으로 이자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한계기업’ 상태에 놓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코스피·코스닥 상장기업의 2347개사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상장사 중 17.5%가 한계기업이었다. 코스피와 코스닥 상장사의 한계기업 비율은 2016년에는 9.3%로 같았으나, 2022년에는 코스피 상장사가 11.5%로 소폭 상승했지만 코스닥은 20.5%로 뛰었다. 전경련은 “코로나19 여파와 고금리라는 외부 충격에 코스닥 기업이 더 취약했던 결과”라고 분석했다.
부실 위험도 커졌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한국 등 아시아지역 기업의 부실을 경고했다. 한국은 2021년 7월부터 2022년 6월까지 이자보상배율(ICR)이 1보다 적은 기업 부채가 전체 기업 부채의 22.1%나 됐다. 세계 평균(16.8%), 아시아 평균(13.95%)보다 높다.
경쟁력이 없고 회생 가능성이 낮은 기업에 퍼주기식 지원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나라 경제가 어려울 때 은행이 돈이 돌게 지원하고 경제 회생을 앞당기는 역할을 해야 한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지만, 번 돈을 얼마나 잘 쓰느냐도 중요 하다. 나만 배부르면 된다는 식의 영업이 계속되는 한 은행의 ‘최대이익’ 성적표는 퇴색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