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로] 그들에겐 사업이 곧 국가였다

입력 2023-09-2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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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향한 창업 1세대 소명의식
기술과 현장 다독인 오너십 빛나
한국 특유의 기업가정신 일궈내

“기계에 불이 났습니다.” 1982년 한겨울 새벽에 최평규 삼영기계 사장(현 S&T 그룹 회장)에게 걸려 온 야근직원의 전화였다.

실화(失火)였다. 며칠 동안 조사를 받고 공장에 돌아온 최 사장은 직원들을 불러 놓고 기계라도 한번 뜯어 보자고 했다. 고쳐 쓰든 고철로 팔든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공장 마당에 신문지를 깔아 놓고 기계를 하나하나 뜯어 나열했다. 마음이 쓰라렸다. 그러나 꼼꼼히 들여다보니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졌다.

미국에서 14만 달러를 들여 도입한 첨단기계였는데 엔지니어인 자신이 보기에는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았다. 아침에는 그을린 기계를 닦고 낮에는 청계천과 구로동을 구석구석 누비고 다니며 부품을 구해왔다.

그런데 자동제어를 담당하는 CNC컨트롤러는 한국에서 달리 구할 수가 없었다. 미국의 제조사에 문의했더니 석 달이나 걸린다고 했다. 어떡하지? 최 시장은 의외의 발상을 한다.

자동연결장치를 끊고 기계부품을 조립해 수동으로 돌려볼 생각을 했다. 시운전을 했더니 품질은 100% 그대로 나왔는데 생산성이 60%밖에 나오지 않았다. 수동작업의 한계였다. 그래도 최 사장은 고무됐다. 그리고 2호, 3호, 4호 기계를 연이어 제작하면서 생산성을 100%까지 끌어올렸다.

마침내 넉 대의 첨단기계를 보유하면서 삼성전자 제습기에 들어가는 콘덴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볼트, 너트까지 모두 역설계(reverse engineering)를 하며 다시 제조한 덕분이었다. 삼영의 고유한 기술 체계가 핵심역량으로 자리잡은 순간이었다.

그 후 최평규 회장은 사업을 확장할 때마다 기술을 봤다. 통일중공업(현 S&T 중공업)을 인수할 때는 게이지룸(정밀측정실)에 가득 찬 게이지(정밀측정기구)에서 회사의 저력을 찾아냈다. 대우정밀(현 S&T 모티브)은 국가가 주는 품질관리대상을 최초로 받은 회사라는 데 착안했다. 효성기계(현 S&T 모터스)에서는 650CC까지 가능한 엔진 개발 기술을 눈여겨봤다. 당시 라이벌이었던 대림기계는 150CC짜리 엔진으로 시장을 누빌 때였다. 그를 M&A(인수합병)의 귀재라고 하지만 이것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기술이라는 핵심역량을 발굴해 꾸준히 사업에 매진했던 경영자였다. 핵심역량을 일관되게 경영에 접목시켜 회사를 키워 낸 것은 그의 오너십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의 오너십은 끊임없이 현장을 찾았다. 그가 부딪힌 현장은 불신과 폭력으로 가득 찼다. 그래서 폭행도 당했고 단식도 했다. 과격 노조원의 폭행으로 큰 수술이 필요했지만, 하루에 침만 100대를 맞으며 버텼다. 현장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파업을 벌이면서도 끼니마다 밥은 꼬박꼬박 챙겨먹는 노조 위원장을 앞에 놓고 “지금 밥이 들어가느냐”며 단식하기도 했다. 닷새나 단식이 이어지자, 현장에서는 격한 대립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단 한 명의 직원을 앞에 놓고도 그는 경영설명회를 진행했다. 그곳도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2005년 S&T 중공업의 노사 상생 공동선언은 현장을 지킨 그의 진정성 있는 오너십의 결과이기도 했다.

1982년 화재가 났을 때 담당 검사로부터 들은 따끔한 지적을 그는 기억하고 있다. “그 기계는 귀한 달러로 들여온 국가의 재산”이라고 했다. 그는 검사를 애국자라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도 나라의 발전에 기여하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나라의 1세대 창업경영자들은 사업의 궁극적인 지향점에 나라를 뒀다. 다른 나라에는 없는 현상이다. 그래서 이병철 회장은 “나라가 잘되면 삼성은 망해도 좋다”고 했다. 정주영 회장은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되는 길이고,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되는 길”이라고 현대중공업의 담장과 지붕에 써놨다.

최종현 회장이 죽음을 앞에 놓고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원고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가 되는 법”이었다. SK가 세계에서 가장 돈 잘 버는 회사가 되는 법이 아니었다. 나라는 경제인으로서 그의 마지막 주제였다.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은 한국을 세계에 내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계 곳곳에 한국을 지어주겠다고 했다. 그들에게 나라는 회사와 따로가 아니었다.

최평규 회장은 “촌에서 조용히 사업하는 기계쟁이”로 자신을 평한다. 그러나 2006년 창원 본사에 기술보국(技術報國)의 표석을 세웠다. 기술로 나라에 보답한다, 그에게도 사업과 나라는 따로가 아닌 하나가 됐고 기술과 현장에 더해 그의 오너십을 규정짓는 핵심역량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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