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어린아이’처럼

입력 2024-02-1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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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택 연필뮤지엄 관장

퇴계가 도산에서 지낼 때, 끼니마다 반찬을 세 가지만 차렸다. 제자 학봉이 뵈러 갔더니 밥을 내주는데 반찬이 무와 가지, 미역뿐이었다. 먹기가 거칠어도 내색을 못하고 있는데, 선생은 복 받은 얼굴로 맛있게 드셨단다.

옛 선비들은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정신을 숭상했다. 빼어난 솜씨는 오히려 어리숙하게 보인다는 의미다. 여기서 ‘졸’은 소박함을 말한다. 소박이란 가공되지 않은 상태, 인위적 기교가 가미되지 않은 수수한 느낌, 평범한 경지를 일컫는다. 퇴계는 상차림에서도 대교약졸을 지향했던 모양이다.

물상에 대한 감각이나 취향은 애초엔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출발하지만 미의식이 발현되면 점차 화려하고 충만한 상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다가 미의식이 한껏 성숙하게 되면 다시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으로 되돌아온다. 정교함이나 농염함에서 벗어나 기교 없이 절제되어 있고 소박하다. 미숙의 소박함에서 완숙의 소박함으로 진화한다.

조선시대의 추사 김정희는 글씨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추사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의 한 부분이다. “나는 칠십 평생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하게 닳게 했다.”

그렇다면 그가 벼루에 갈아 없앤 먹은 몇 개나 될까? 벼루와 먹의 강도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어림하기 힘들지만, 먹 오백 개가 닳을 때 벼루 하나가 뚫린다고 가정하면, 오천 개 정도의 먹을 간 것이리라. 칠십 년 동안 벼루 열 개, 붓 일천 자루, 먹 오천 개와 씨름하면서 만들어낸 글씨가 추사체다. 그가 죽기 사흘 전에 마지막으로 쓴 글씨가 ‘板殿(판전)’이다. 옆에는 ‘七十一果病中作(칠십일과병중작)’이라 하여 71세 때 과천에서 병중에 쓴 것임을 밝혔다.

판전은 서울 코엑스 옆의 봉은사에 있는 전각이다. 경판을 보관하는 장경각(藏經閣)인 동시에 예불도 드리는 불전(佛殿)이다. 추사가 쓴 현판의 글씨 ‘板殿’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의 글씨와는 매우 다르다. 획이 뭉뚝뭉뚝하고 삐뚤빼뚤하다. 획과 획, 빈 공간과의 대비와 짜임새도 엉성하다. 늙고 병든 추사가 기운이 쇠하여 글씨도 그린 된 것일까? 붓이 아닌 다른 것으로 썼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는데, 붓글씨 특유의 섬세함이나 우아함과는 동떨어져 있다.

언뜻 보면 서툴러 보이는데 이 글씨에 자꾸 눈이 간다. 아무런 기교도 부리지 않고 무심하게 써 내려간 글씨, 인생을 달관한 추사의 진솔함과 무념무상을 엿보게 된다. 소박함(拙)이 극치에 이른 필치다. 글씨의 모양새가 어린아이가 쓴 듯 어설프고 유치하여 미술사가들은 ‘동자체(童子體)’라고 부른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천진무구함으로, ‘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자연 그대로의 맑고 순수’한 상태를 일컫는다.

추사는 죽음에 이르러 어른의 의식을 걷어내고 아이로 돌아가 글씨를 썼다. 추사는 진작부터 ‘불계공졸(不計工拙: 잘 하고 못 하고를 따지지 않는)’이라는 인장을 애용했는데 대교약졸을 자신의 방식으로 체화시킨 것이다. ‘잘 써야겠다는 생각도, 못 써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평상심으로 쓴, 그 못생긴 글씨가 예술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추사보다 100여 년 뒤에 태어난 천재 화가, 파격의 선수였던 파블로 피카소도 “나는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법을 알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했다. 누군가 추사나 피카소의 얼핏 어설퍼 보이는 작품을 대하면서 “나도 저렇게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어린아이이거나 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어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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