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중재 접수 29건…1년 새 32%↑
국제 중재 접수도 ‘0→5건’으로 급증
가요‧드라마‧영화 이어 문학까지
K컬쳐 영역 확장에 분쟁 더 늘 듯
영화제 수상작 개봉 전 불법 복제됐지만
법원, 손해배상액 ‘단돈 100만원’만 인정
“문화‧엔터 종사자 창작 의지 꺾여” 지적
K컬쳐가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중심이 되면서 관련 분쟁 또한 급증하고 있다. 하지만 힘들게 만든 콘텐츠에 관한 저작권이 침해된 경우 실제 손해 규모를 입증하지 못해 패소하거나 재판이 장기화하면서 국내 문화·엔터업계 종사자들의 창작 의지를 꺾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8일 본지가 대한상사중재원 ‘클레임 통계’를 분석한 결과,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 동안 엔터테인먼트 분야 중재 접수실적은 △2019년 41건(국내 40건·국제 1건) △2020년 30건(국내 29건·국제 1건) △2021년 19건(국내 16건·국제 3건) △2022년 22건(국내 22건·국제 0건) △2023년 29건(국내 24건·국제 5건)으로 집계됐다. 2021년 저점을 찍은 후 점차 늘고 있는 양상이다.
클레임이란 무역 거래에서 수량·품질·포장 등에 계약 위반 사항이 있을 때 매주(賣主)에게 손해배상 청구 또는 이의 제기를 하는 일을 일컫는다. 중재 사건은 소송과 구조가 동일하다. 조정이 성립하면 당사자에게 구속력이 생긴다. 다만 상사중재원 중재 판정은 단 한 번으로 종결된다. 3심제를 채택하는 소송과 다른 점이다.
문진구 법무법인(유한) 세종 IP(지식재산권) 그룹 변호사는 “코로나19 팬데믹(전염병 대유행)으로 인해 계획된 공연·전시 등을 취소 내지 연기한 조치를 불가항력적 사유로 볼 수 있는지 아니면 그로 인한 배상 책임을 누구에게 귀속시킬지를 두고 분쟁이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가했다. 세종 IP그룹은 민희진 전 어도어 대표 법률 대리를 맡고 있다.
특히 국제 중재 접수가 지난해 5건으로 크게 늘어난 점이 눈에 띈다.
법무법인(유한) 율촌에서 스포츠·엔터테인먼트 송무를 담당하고 있는 권성국 변호사는 “2021년까지 코로나19 감염증 확산에 따른 투자 위축으로 엔터테인먼트업계 전반적으로 불황을 이어가다 2022년부터 투자가 급격히 확대되며 이에 따른 분쟁이 폭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권 변호사는 이어 “한강 작가의 세계 최고 문학상인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세계인의 이른바 ‘K컬쳐’ 관심 영역이 문학 부분까지 확장할 것으로 기대되고, 자연스럽게 국제 분쟁 역시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피프티피프티와 다른 뉴진스 ‘무소송’
‘템퍼링’(전속계약 만료 전 접촉)이란 생소한 용어를 알린 아이돌 ‘피프티피프티’ 사건을 비롯해 그룹 뉴진스 사태까지 엔터분쟁이 사회이슈로 떠오른 지 오래다. 문제는 실효적인 분쟁 해결 기준이 거의 전무하다는 데 있다. 기준이 없다보니 소송을 먼저 제기하는 쪽이 불리하다. ‘주장하는 자가 입증책임을 진다’는 민사소송법상 거증책임 원칙에 따라 원고가 자신이 입은 피해액을 구체적으로 증명해내야 하는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한 뉴진스가 지난달 29일자로 하이브 산하 레이블 어도어 측에 전속계약 해지를 통보하면서 “소송을 하지 않겠다”, “위약금을 물어낼 필요가 없다”고 밝혀 주변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배경에는 이 같은 소송실무상 어려움이 있음을 간파한 대응전략으로 풀이된다.
양측 대립이 첨예한 위약금을 산정하려면 많이 받아내려는 쪽과 조금 물어주려는 쪽 가운데 누구 주장이 합리적인지 제3의 전문기관을 통한 감정이 필수다.
문 변호사는 “음악 저작물의 음반 저작권 감정의 경우 1년 가까이 진행된 사건이 많다”면서 “엔터테인먼트·문화 산업 분쟁에 있어 감정기간이 통상적으로 길다”고 전했다. 전체 소송기간이 3~5년 이상 소요되면서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날 때쯤이면 전속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그 사이 수익금은 현실화하고 매출을 계산할 수 있는 상황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장래 이익 개념을 뜻하는 위약금을 산출할 소송 실익이 사라지게 된다.
최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연구용역 의뢰로 한국재정학회가 제출한 ‘출판콘텐츠 제작비용 세액공제 방안 연구’(2024년 10월)를 보면, 책임연구자 임병인 충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직접 소비하기 전에는 그 재화로부터 효용을 얻을 수 없는 경험재의 속성을 가져 콘텐츠는 고위험 재화”라며 “콘텐츠재화는 전형적인 고위험-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 성격을 갖는다”고 짚었다.
임 교수는 “콘텐츠재화는 무형의 가치를 가진 문화와 유형의 재화를 생산하는 산업 성격이 혼재되어 생산되는 특성을 지녀 연구개발(R&D) 부문을 제조업과 같은 기준에서 적용하는 게 쉽지 않다”고 꼬집었다.
불법복제 피해를 입고도 고작 100만 원을 손해배상 받은 이정섭 감독의 영화 ‘낙인’ 사건에서도 재판부는 “이 사건 영상 저작물의 전파 규모 등이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라고 판결문에 적었다. 그 만큼 무형 재산을 수치화하는 방법을 찾고자 했던 법원과 법관 고심이 컸음이 읽혀진다.
권 변호사는 “주무 부처가 당사자 간 갈등 해소를 위한 가이드라인 등 자율규제를 마련해도 그것이 실제 당사자의 자율적 분쟁 해결에 얼마나 실효적인 도움이 될지는 개인적으로 의문이 든다”며 “새롭게 등장하는 다양한 계약 구조에 맞춰 표준계약서를 추가 제정함으로써 분쟁을 사전적으로 예방하는 게 현실적으로는 더 실효적이라 생각한다”고 조언했다.
박일경 기자 ekpark@·김이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