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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에서 직무급이 정착될 수 있었던 이유는 시장임금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정 직무를 수행하면 어느 기업에 가더라도 비슷한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 있으며, 이는 노사 간 장기적인 협상과 합의를 통해 형성되었다. 유럽과 미국의 경우, 초기업별 노조와 사용자 단체가 산업 전반에서 협의하며 직무 가치를 조정해 왔다. 이러한 사회적 기반이 없이는 직무급의 핵심 요소인 공정성과 보편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반면, 한국은 기업별 노조가 주를 이루며, 산업 단위의 사용자 단체도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시장임금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직무급을 공공기관에 도입하려는 시도는 그 본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방식은 개별 기관이 직무의 가치를 자체적으로 평가하고 임금 체계를 설계하도록 하고 있다. 이 방식은 기관별 형평성 문제를 초래할 뿐 아니라, 동일 직무에 대한 시장임금과의 괴리를 확대시킬 위험이 있다.
공공기관 직무급 도입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먼저 시장임금 형성을 위한 사회적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직무급 도입보다 중요한 것은 직무별 역량을 명확히 규정하고, 이에 따른 발전 경로를 구축하는 등 직무 중심의 인사관리를 확대하는 것이다. 기획재정부도 공공기관 인사운영 혁신과제로 이를 강조하고 있으며, 국가직무능력표준(NCS) 등을 활용해 체계적인 교육훈련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임금 체계 개편을 넘어, 조직의 효율성과 전문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정부는 직무급 도입을 서두르기보다, 노사 협력과 사용자 단체 활성화를 통해 시장임금 체계를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공공기관 직무급 제도, 지금은 속도보다 방향이 우선이다. 신동헌 에이플 노무법인 대표노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