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라운드 서비스 협상 과정에서의 수년간의 과도한 업무로 결국 탈진까지 한 공무원들의 눈물겨운 사연. 정부와의 친밀도만 믿고 펼쳤던 차입 경영이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와 무너져 버린 대우그룹. 100년 만에 12시간이 줄어든 서울-부산간 철도운행 시간.
이는 한국경제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애환들과 발전 과정을 종합해 한국경제 60년사 편찬위원회가 2일 발간한 ‘한국경제 60년사’에 담긴 내용들이다.
여러 일화들 중 1990년대 우루과이라운드 서비스 협상에서의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활약상이 눈에 띈다. 당시 우루과이라운드 서비스 협상중에서도 특히 시장 개방 협상은 우리나라에게는 중요하고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부문이었다. 때문에 정부는 당시 서비스 협상을 담당한 경제기획원 공무원들뿐 아니라 한국개발연구원(KDI)과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등 국책기관들도 총동원하는 ‘올인’ 전략을 펼쳤다.
첫 서비스 협상인 만큼 진행되는 모든 협상 내용을 꼼꼼히 메모했고, 이를 나중에 녹취록처럼 재구성해 기록에 남겼다. 공무원들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른 것도 당연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협상은 쉽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1990년 후반부터 진행된 협상은 1993년 말까지 약 3년간이나 이어졌다. 협상은 매달 이어졌고, 투입된 공무원들은 이 기간 동안 매번 메모를 해 수백 페이지의 기록을 남겼다. 게다가 협상 전에는 관계부처 회의, 협상 후에는 협상 결과 보고까지 준비해야 했다.
바짝 긴장한 상태에서 거의 휴일 없이 몇 년 동안 협상을 벌이다 보니 체력은 바닥이 나고, 의지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부 협상 담당자들은 제네바에서 탈진하고 말았고, 다행히 응급조치를 받고 겨우 의식을 차리기도 했다는 것.
또한 60년사는 대우그룹의 몰락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대우는 과거 정부의 지원이 한국에서 성공하기 위한 핵심 ‘키’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와의 우호관계를 어느 기업보다 돈독하게 맺었다. 실제로 정부와의 좋은 관계가 대우의 ‘세계 경영’의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우의 전략은 세계경제가 호황을 누릴 때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경제 위기 상황에서는 매우 위험한 방법이었다. 특히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은 이를 간과해 대규모 차입 경영을 지속하는 실수를 범하게 되고, 이를 갚지 못한 대우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고 60년사는 전했다.
또한 눈길을 끄는 것은 100년 전 서울-부산 간 철도 운행시간과 현재 운행시간을 비교한 한 내용이다. 60년사에 따르면 1905년 서울 영등포에서 부산 초량까지 개통된 경부선 운행 소요시간은 14시간이었다. 그해 5월1일부터 운행을 시작한 열차 이름은 ‘융희호’. 융희호는 증기기관차로 평균속도가 시속 31km였고, 최고속도는 51km였다.
이후 1955년 디젤기관차인 통일호가 새롭게 등장하면서 운행시간은 절반으로 뚝 떨어져 7시간이면 운행이 가능했고, 성능이 개선된 디젤기관차인 새마을호가 투입된 1985년에는 4시간10분으로 단축됐다. 그리고 올해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서울-부산 간 운행 소요시간은 2시간도 되지 않는 1시간56분까지 줄어들었다. 이로써 서울-부산 간 운행 소요시간은 100년 만에 12시간 이상 줄어 명실상부한 1일 생활권이 현실화됐다.
아울러 60년사는 2050년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현재 4.5%에서 2%대로 하락할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에, 신성장동력을 발굴하고, 거시경제의 불안요인을 낮추기 위해서는 물가안정목표를 선진국 수준인 1~3%로 낮추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60년사는 경제일반, 산업, 대외경제, 국토·환경, 사회복지·보건 등 총 5권 1질, 3500페이지에 달하며 편찬을 위해 KDI를 비롯한 19개 연구기관에서 155명의 집필진이 참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