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멘트업계가 고사 위기에 처했다. 건설경기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일부 시멘트업체들이 재고 소진을 위해 무차별적인 가격 덤핑에 나서면서 줄줄이 적자로 돌아선 것이다. 이렇다보니 업계의 제살 깎아먹기식 가격 경쟁이 도를 넘어섰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여기에 산업정책을 담당하는 지식경제부 마저 민간기업의 일이라며 손을 놓고 있어 상황은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시멘트업계는 “이같은 상황에서는 생산할 수록 밑지는 장사가 될 수 밖에 없다”며 하소연한다. 전문가들도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업황을 고려하면 시멘트회사의 자구책 마련은 사실상 전무하고, 업계의 자율적인 조정도 기대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 시멘트업계가 어떻길래
지난해 주요 시멘트 5개사의 누적적자 규모는 1000억원에 육박한다. 지난 2008년부터 하락세로 접어든 건설경기로 판매 부진이 이유다.
실제로 시멘트 내수 수요는 지난해에 비해 310만톤 가량 줄어든 4530만톤에 불과하다. 민간건설 경기 침체 장기화로 건설사들이 줄줄이 워크아웃을 선언하는 등 착공 지연 사례가 늘어나면서 수요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시멘트 업계의 생산설비는 그대로인데, 수요는 40% 가까이 줄어들면서 가격 하락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시멘트 가격은 지난 2009년 4분기에 톤당 6만7000원이었으나 올들어 3월 현재 20% 가량 하락한 5만원 초반선에 불과하다.
여기에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유연탄 값 급등이 손실 폭을 확대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지난 2005년 톤당 평균 65달러였던 유연탄 가격이 지난 2008년부터 120달러에 육박하면서 시멘트 업계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전망은 더욱 안좋다. 우리나라 시멘트 업체들이 주로 수입하는 중국이 지난 2009년부터 발전용 수요가 늘어나면서 유연탄 순수입국으로 전환한 탓이다.
이로 인해 유연탄 수입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2010년에 135달러까지 올랐다. 유연탄은 시멘트 원가 변동에 있어서 가장 큰 결정요인으로 작용한다. 매출원가 대비 비중이 지난 2009년 25.3%에서 지난해에는 28%까지 치솟았다.
◇ 왜 이렇게 됐나
동양, 쌍용, 한일, 아세아, 성신 등 지난해 실적을 공시한 주요 5개 시멘트사의 지난해 매출액은 2조9675억원으로 2009년 3조1544억원보다 6% 가량 줄었다. 2년째 손실을 기록한 아세아와 동양시멘트, 지난해 적자로 돌아선 성신, 순이익이 400억원에서 80억원으로 급감한 한일시멘트 등 5개 시멘트사의 이익은 모두 2500억원 이상 넘게 줄었다.
가격 하락으로 매출은 감소한 반면 원료값은 올랐으니 이익이 주는 것은 당연하다.
IBK투자증권의 시멘트업황 지표는 지난 2007년 95.2로 고점을 찍고 점차 내려와 2009년에는 68.2까지 주저앉았다. 2010년은 단가를 6만7000원으로 조정한 효과가 반짝 빛을 발해 72.3으로 회복되는 듯 했으나 올해 예상치는 70.5로 다시 하락할 전망이다.
윤진일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지난해 8월 보고서에서 시멘트업종의 이같은 경기악화를 일찌감치 예견했다. 주식시장에 상장된 한일, 아세아 등의 주가도 오르기 힘들 것으로 내다봤다.
윤 연구원은 “수도권 신도시 개발이 이미 성숙단계에 들어선 데다 공공발주 감소로 시멘트 업황은 2011년 말까지 둔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수도권 신도시 개발이 성숙단계에 이르렀고 주택보급률도 증가해 연평균 주택공급은 2000~2007년 52.1만호에서 37~40만호 수준으로 하향 안정될 전망인 반면 시멘트 생산설비는 1997년 이후 6867만톤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공급과잉 현상이 지속되면서 주택경기의 호황 전환이나 산업 구조조정과 같은 외부변수 없이는 시멘트 공정단가(6만7500원/톤)의 자율적인 준수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주요 5개사에다 라파즈한라시멘트, 현대시멘트를 포함한 대형 7개사의 시멘트 시장 점유율이 91%에 달해 업체간 점유율 경쟁은 갈수록 치열할 수 밖에 없다.
△ ‘죽고 살기 식의 덤핑경쟁 ’난무
공급과잉 상황이 지속되면서 시멘트회사들이 영업이익률을 따지지 않고 가격 인하 경쟁을 벌이고 있다.
S증권사 시멘트 담당 연구원은 “상대적으로 재무상태가 좋은 소수 시멘트 회사가 가격을 파격적으로 낮추면서 다른 회사들도 어쩔 수 없이 따라오게 됐다”며 “현재도 시멘트 공정의 가동률은 60%대로 낮은 편이고 감가삼각 비용이 커서 생산량을 줄이기는 어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한 건설업체 관계자는 “구매하는 레미콘 단가가 지난 2009년 톤당 5만5000원에서 2010년 5만3200원으로 떨어졌고, 올해는 5만1400원 수준으로 낮아졌다”며 “시멘트를 사들여 생산하는 레미콘 단가가 이 정도라면 시멘트가격은 더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시멘트 업계 내부 이야기는 좀 더 노골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 A씨는 “일부 업체들이 톤당 가격을 5만원대까지 끌어내린 것도 모자라 시가로 계약을 하고 뒤로 운송비를 지원해주는 식으로 시멘트가격 인하경쟁을 부추기고 있다”고 귀띔했다. 예를 들어 레미콘 업체에 시멘트를 톤당 5만3000원씩 받기로 계약을 해놓고 운송비 지원금으로 톤당 2000원씩을 다시 돌려주는 방식이다. 시멘트의 실거래가가 5만1000원이 되는 셈이다.
이 관계자는 “한 업체가 지원비로 돌려주기로 하고 거래를 성사시키면 앞서 계약을 마치고 전표를 끊은 다른 업체들도 레미콘업체에 운송지원비를 소급해 돌려줘야 계약을 유지할 수 있다”고 털어놨다.
이같은 상황에서 일부 시멘트업체들은 신재생에너지 사업과 같은 새로운 사업을 통한 경영난 타개에 나서고 있다.
동양과 한일은 폐열발전소로, 쌍용양회는 태양광발전소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이같은 시도가 가시적인 효과를 내기까지는 아직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앞으로 배출권 거래제도까지 도입된다면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투자와 배출권 구입비용이 추가적으로 발생하게 돼 시멘트 업체들의 생존권은 더욱 위협받을 수 밖에 없다.
업계 일각에서는 성수기로 여겨지는 2분기를 앞두고 시멘트 단가가 재조정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지만 수급 불균형과 원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시멘트업계의 고질적인 경영 불안정 상태는 기대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