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1960년대 정부 주도의 경제발전기에도 우리은행은 선두은행 역할을 톡톡히 했다. 우리은행의 전신인 상업은행과 한일은행 모두 경제개발계획의 수립과 함께 산업금융체제로 개편돼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우선 상업은행은 1960년대 중반에 들어 점포망 확장과 다양한 금융서비스를 무기로 선두은행으로 부상했다. 특히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금융시장이 더욱 치열해지자 안심예금 등 인기상품을 개발해 고객에 가까이 있는 은행으로서의 이미지를 높였다.
현대화된 금융시스템을 위해서는 은행업무의 기계화가 절실했으며, 고객의 대기시간 단축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이에 미국, 유럽, 일본 등 금융선진국의 금융기관에 직원을 파견해 새로운 금융업무를 도입하고 위폐김식기, 지폐계산기, 텔레타이프 등의 기계를 도입했다. 또한 은행전산화를 빼놓을 수 없는데, 전산부문 경쟁에서도 선두 위치에 서서 은행전산화를 리드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1960년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각 부문에서 다른 은행과의 경쟁에서 확실하게 우위를 보이며 상업은행 전성시대를 구가했다”고 밝혔다.
우리은행의 또다른 큰 줄기인 한일은행도 고객에게 금융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고 은행의 업적신장을 위해 1981년 복리적립카네이션 정기예금을 개발했다. 특히 독자적으로 ‘신용카드업무’를 연구개발해 1981년 6월 5개 시중은행이 ‘은행신용카드’업무를 공동으로 취급할 수 있도록 선도적 역할을 했다.
1981년 8월에는 야간예금금고업무를 처음으로 개시했으며 모든 업무의 전산화계획에 따라 주요 예수금에 대해 전점포의 온라인화와 현금자동지급기를 도입해 1982년 2월 롯데1번가에 최초로 설치했다. 1983년 3월에는 가계자금의 효율적인 지원과 각종 서비스를 최대한 제공해 국민의 은행이용 편의를 도모하고자 ‘카네이션 종합통장’을 개발했고, 1983년 5월부터는 그동안 국민은행에서만 취급해 오던 상호부금업무를 취급하게 됐다.
한일은행은 1980년 정부의 ‘일반은행 경영의 자율화방책’에 따라 민영화에 가장 적합한 은행으로 선정됐으며 1981년 6월 주식대금의 납부가 완료됨에 따라 명실공히 민영은행으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
은행권 관계자는 “1970년 급격한 성장을 이룬 기업들은 은행의 자금지원을 바탕으로 과감한 투자를 해 나갔기 때문”이라며 “은행의 경제발전의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