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6월 12일 새벽. 김우중 대우조선 회장은 급히 귀국한다. 모스크바 국제회의 참석차 소련을 방문하고, 프랑스에 들러 선주들과 중요한 수주계약을 앞두고 있던 때다.
그의 급작스런 귀국은 그룹 기조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당시 대우조선은 근로자 분신자살 영향으로 노조 파업이라는 극단적인 파국양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김 회장이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한 말은 "나중에 브리핑하겠다"는 단한마디였다. 입을 굳게 다문 그는 발길을 곧바로 사무실로 향했고, 오전 8시 10분 그룹 간부들로부터 대우조선 파업 사태에 관해 조목조목 보고를 받는다. 이후 헬기편으로 옥포에 도착한 그는 제일먼저 양복을 벗어던지고 직원들과 같은 작업복을 착용했다. 눈을 맞추고 귀를 열었다. 경비절감 차원에서 자전거로 조선소를 돌며 말단 사원까지 직접 대화의 창에 끌어들였다. 그리고 이른바 '희망 90s운동' 슬로건을 내걸었다. '희망찬 1990년대를 열자'는 의미에서다.
이같은 그의 열정과 정성이 분에 찬 노조원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전국민 관심속에 진통을 거듭해온 대우조선 노사분규가 임금교섭 36일, 조업중단 25일째인 6월 22일 극적으로 타결된다.
그는 노사분규 타결 이후에도 2년여동안 옥포에 상주하며 노조위원장과 직접 담판을 벌이며 회사를 정상화 궤도에 올려놨다.
당시 근로자들의 분배 욕구가 늘어난 데다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분규 현장 가세 등 노동운동에 정치 투쟁까지 가미됐던 분위기는 현재의 한진중공업 파업사태와 별반 차이가 없다.
우리 조선업계는 한국 노동운동사를 대표하는 산증인 역할을 했다. 시대상황 여파로 그만큼 강하고 치열할 수 밖에 없었다. 지난 1980년 말부터 촉발된 '골리앗 투쟁과 같은 치열한 노사대립 사건들에서 대우조선은 선봉장 역할을 자처했다.
1980년대 말 전 세계 조선산업의 불경기와 격렬한 노사분규로 파산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그는 당시 집무실로 애용하던 힐튼호텔 23층의 '펜트하우스'를 버리고 현장에서 답을 찾기 위해 달려갔다. 지난 1978년 대한조선공사 옥포조선소를 인수, 설립한 대우조선은 그에게는 혈육과 같은 분신이었다.
1999년 대우그룹 구조조정 계획에 반발해 전면파업이 일자 김 회장은 "대우자동차를 포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대우조선을 포기하는 일은 없다"며 강한 애착심을 보였다..
이후 대우조선은 1994년 대우중공업에 흡수된 이후 대우의 효자 사업부문으로 자리잡았고 전 세계 시장에서도 현대중공업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경쟁사로 성장을 거듭했다. 20년 연속 무분규의 안정된 노사관계도 형성됐다. 당시 근로자들과 공고동락하던 그의 모습은 재벌에 부정이던 국민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조선업계 역시 정리해고 대상자도, 노조원도 아닌 제3자가 남의 회사 크레인에 올라가 사회적 물의가 일고 있는데 정작 책임 당사자가 40일 넘게 해외에서 체류를 하는 이유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평소 조 회장은 자신의 행적이 드러나는 걸 꺼린다는 게 업계 후문이다. 전면에 나서는 것을 꺼리는 경영 스타일이 이번 사태를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이런 회사에 배를 만들어 달라고 맡길 외국 선주가 없을 것입니다." 조선업계 한 관계자는 이렇게 한탄한다. 자칫 한진중공업 사태가 전체 우리 조선업계 기업 이미지 실추로 이어질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