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팀장은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어려웠던 집안 형편으로 지난 1982년 국민투자신탁(현 한화투자증권)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입사 후 회사 규정집을 전부 외우는 등 만능으로 통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결혼하면서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김 팀장은 “당시에는 결혼한 여자의 책상을 회사가 치워버리는 내용의 드라마가 나올 정도로 결혼한 여자가 직장에 다니는 것이 창피한 일로 여겨졌던 시기”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회사를 나온 후 전업주부 생활을 하며 행복을 느끼던 김 팀장을 세상은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현대증권이 국민투자신탁 인수로 투신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우수하면서도 저임금에 사용할 수 있는 인력을 찾고 있었던 것. 국민투자신탁 근무시절 업무에 능통하기로 유명했던 김 팀장은 이렇게 퇴직 7년 만에 월급 100만원짜리 계약직으로 현대증권에서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나이는 36살. 6살 아들까지 둔 전형적인 ‘아줌마’였다.
하지만 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야근에 주말이 없었던 건 기본이고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자다가도 일어나 메모를 했다. 100만원 월급에도 자비를 들여 회계학원을 다니며 공부했다. “너같이 직장생활하면 회사를 어떻게 다니겠냐”는 남편에 핀잔에 사표를 쓰기만 3번. 회사는 연봉계약서를 4번이나 고쳐가며 김 팀장을 붙잡았다. 직위도 1년 만에 계약직 사원에서 정규직 대리로 높아졌다. 전례 없는 초고속 승진이었다.
김 팀장은 “원래 일을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라 낮은 연봉에도 열심히 일할 수 있었던 것 같다”며 “당시 시댁과 남편 모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돈을 벌 이유도 없던 시기였다”고 전했다. 김 팀장은 펀드와 관련된 업무는 업계에서 최고라는 자부심을 갖고 관련 전산시스템과 상품 개발, 설명회 등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국민투자신탁 시절과는 달리 직원의 성별, 학벌보다는 성과나 열정을 중시하는 직장분위기도 김 팀장에 힘을 실어줬다.
언론과 강연 등을 통해 상품개발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고객의 자산운용 상담을 도와주기도 했다. 2003년에는 교보증권으로 자리를 옮겼다. 향후의 교육비 상승을 예견한 ‘교보 에듀케어 학자금펀드’를 출시하는 등 자산관리팀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김 팀장은 2006년 교보증권의 첫 프라이빗뱅킹(PB) 센터인 강남 PB 센터장으로 발탁돼는 행운도 잡았다.
교보증권이 1호인 PB 센터장으로 여성인 김 팀장을 선택할 정도로 김 팀장에 대한 신뢰는 컸다. 신뢰는 곧바로 결과로 나타났다. 부임한지 1년 만에 2300억원의 자금유치를 달성한 것이다. 김 팀장은 “많은 자금을 끌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보다도 실력이다. 부자들은 일방적으로 사람 믿지 않고 PB의 내공을 누구보다 빠르게 간파해낸다”고 설명했다.
김 팀장의 업무에 대한 열정은 결코 지치지 않는다. 직장생활의 경험을 통해 책도 2권 펴냈다. WM지원팀장으로 본사로 다시 돌아왔지만 고객과의 인연은 계속되고 있다. 모두 김 팀장의 꾸준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제 한 부서의 장까지 승진하다보니 실무자였을 때는 몰랐던 여성으로서의 한계가 약간 느껴진다는 김 팀장.
그래도 김 팀장은 후배 여직원들에 “조직에는 여자가 없다. 스스로 여자라 배려 받으려는 생각을 바꿔야 남자 직원들과 대등하게 인정받고 대우받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며 “능력과 인품을 키워 빛나는 사람이 돼야 기업의 의자 빼앗기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