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를 달려온 한국자동차]뻥 뚫린 고속도로…피아트132 '꿈의 속도'로 질주

입력 2012-02-1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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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차, 브리샤 성공 이후 자신감 생겨…최고시속 170km·최고급 사양 고급차 인식

▲기아차가 피아트와의 기술 제휴를 통해 생산한 피아트132는 국내 고급형 중형차의 효시로 꼽히는 차다. 최고시속이 171km에 이르고, 실내 공간이 넓다는 장점 덕에 고속화 시대 초기 상류층의 대표 차종으로 견조한 인기를 얻었다.
1970년대는 우리의 교통 환경이 본격적인 고속화, 첨단화 시대를 열어젖힌 시기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1973년 호남고속도로의 개통은 전국을 1일 생활권 시대로 바꿨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도로가 생기면서 사람들은 빨리 달리고 싶다는 욕망과 빠른 차에 대한 궁금증을 품게 된다. ‘슈퍼 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던 시절 최고시속 150㎞를 넘나드는 꿈의 고속차가 등장하게 된다. 한때 기아자동차에서 생산됐던 ‘피아트 132’가 주인공이다.

◇피아트 자존심 담긴 伊 최고급 차=피아트 132는 1972년 이탈리아 피아트가 생산한 최고급형 중형 승용차다. 후륜구동 방식으로 1.6리터 엔진을 얹었던 피아트 132는 훗날 2.0리터 엔진을 얹은 GLS 모델까지 등장하게 된다.

피아트 132의 차체는 한 때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포드 코티나와 비슷한 크기였다. 최고출력은 112마력으로, 최고시속 170㎞까지 가속이 가능했다. 당시로서는 초고속 승용차에 속했던 모델이지만 엔진의 소음만큼은 조용했다. 피아트가 회사의 명운을 걸고 만든 DOHC 엔진 덕분이다. DOHC 엔진은 일반 엔진에 비해서 흡기와 배기의 밸브 개폐시기가 정확했고, 소음도 적었다.

운전에 필요한 사양 역시 당시로서는 최고급 수준이었다. 파워 핸들과 자동개폐식 파워 윈도가 장착돼 주행 편의성과 안정성을 높였고, 핸들의 상하 위치 조정도 가능해 운전자들의 편의를 도왔다. 서스펜션 역시 완충효과와 승차감이 뛰어난 위시본식 방식과 코일 스프링을 장착한 덕에 안정적인 충격 흡수 효과를 냈다.

실내 공간 역시 다른 제품에 비해 넓었고, 운전자가 몰기에 편안하게끔 시트와 각종 장치를 설계한 점이 피아트 132의 특징이었다.

◇‘브리샤 성공’ 기아의 첫 중형차 도전=피아트 차가 국내에 도입된 것은 1970년대 초다. 1971년 피아트와의 기술 제휴를 통해 피아트 124를 생산했던 기아산업(현 기아자동차)은 소형 왜건이자 순수 국산 제작 승용차인 브리샤가 성공을 거두면서 자신감을 얻게 된다. 그리고 더 큰 시장인 중형차 생산을 꿈꾼다.

1976년 동국제강으로부터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한 기아산업은 아시아자동차를 통해 피아트 132의 생산을 추진한다.

3년 뒤인 1979년 기아산업은 피아트와의 기술 제휴 및 부품 수입을 통해 아시아자동차에서 2.0리터 4기통 엔진을 얹은 피아트 132 GLS 모델을 생산한다. 피아트 132는 기아산업이 처음으로 생산한 중형차인 셈이다.

월 500대 정도 생산된 피아트 132는 비슷한 시기에 생산된 ‘푸조 604’와 함께 4월부터 공식 판매에 돌입했다. 당시 가격은 651만원이었다. 쉽게 구입하기 어려운 금액임에도 피아트 132는 우수한 성능 덕에 견조한 인기를 구가했다. 특히 국내 고위 공직자들이 이 차를 주로 타고 다닌 덕에 ‘상류층의 상징’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러나 기아가 피아트 132를 정상적으로 공급하는 데에는 난관이 있었다. 당초 1979년 2월 중순 경 정식 출하될 예정이던 피아트 132는 두 달 정도 미뤄진 4월 28일 시장에 첫 선을 보였다.

당시 출시가 미뤄진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브리사와 타이탄 등 기존 차종의 계약대수가 밀린 것도 문제였고, 피아트 이탈리아 본사로부터 부품 공급이 늦어진 이유도 있었다. 무엇보다 문제였던 것은 피아트 측이 자사의 브랜드를 곧이곧대로 빌려줄 수 없다는 입장을 한동안 고수했다.

피아트 측은 “기아가 만든 피아트 132가 엔진과 차체철판을 빼면 국산화율이 61%에 이른다”며 “국산화율 40%가 넘으면 피아트의 이름과 성능이 보장되지 못하기 때문에 피아트 이름을 빌려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 때문에 당시 국내 도로에 운행됐던 피아트 132는 브랜드 이름이 빠진 채 ‘132 / 2000’이란 숫자만 표시됐다.

기아는 피아트 측에 “국산화율이 높아도 피아트의 품질과 기술이 보장됐으니 이름을 빌려달라”고 피아트를 설득했다. 그제서야 피아트는 기아의 설득에 수긍하고 브랜드 이름을 단 피아트 132 판매를 허용했다.

◇車산업 합리화 조치로 짧은 세월 마감=1979년 국내에 첫 선을 보인 피아트 132는 1981년 2월 생산을 중단하게 된다. 전두환 정권이 자동차산업에 대해 합리화 조치를 내리고, 각 업체별로 생산 차종을 국한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중·소형차는 현대와 새한(현 한국GM), 1~5톤 소형 상용차는 기아, 특장차는 동아(현 쌍용차), 군용차는 아시아자동차에서만 만들도록 조치를 취했다.

별안간 승용차 제조 권리를 뺏긴 기아산업은 피아트 132 생산을 접었다. 이는 막대한 경영 손실을 불러왔고, 피아트와의 국제 소송 위기까지 맞게 된다.

기아는 1981년 초 피아트의 부품 수입량을 월 300대 수준으로 줄였다가 피아트가 계약 위반이라며 국제재판 제소를 천명해 곤욕을 치렀다. 가까스로 국제재판 직전에 사건이 잘 해결된 것이 다행이었다.

기아가 마지막으로 피아트 132를 판매한 것은 1983년 무렵. 이때까지 국내에서 팔린 피아트 132의 대수는 4759대였다. 국내 생산 2년 만에 아쉽게 세상에서 사라진 피아트 132는 국내 고급 중형차 시장에서 큰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들은 “오늘의 국내 고급차 시장의 뿌리 역할을 한 것이 피아트 132”라며 “5공 정권의 정책 놀음만 아니었다면 장수했을 명차”라고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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