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회장이 틈만 나면 자이언트 베이비(Giant Baby)를 외치며 집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이언트 베이비는 SK그룹의 양대 축을 이루는 에너지와 통신을 이어받을 후계 사업을 뜻한다.
그러나 최 회장의 자이언트 베이비 발굴 및 육성은 사실상 실패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아 지난해부터는 남미로 눈을 돌렸지만 성과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깊어질 대로 깊어진 최 회장의 고민은 최근 한방에 해결됐다. 하이닉스반도체 인수로 출범한 SK하이닉스가 그것이다. 자이언트 베이비가 아닌 자이언트 자체에 승부수를 띄운 게 해법이었다. 최 회장뿐 아니라 SK그룹도 새식구가 들어와 달라진 그룹 위상에 잔칫집 분위기다.
실제 최 회장과 SK그룹에게 SK하이닉스의 출범이 가져다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먼저 최 회장 입장에서 보면 오너로서 회장직을 본격 수행하기 시작한 2004년 이후 거둔 첫 성과물이다. 손길승 회장을 전면에 내세우고 회장 타이틀만 달았던 199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마찬가지다. 선대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사업 수성 외에는 딱히 경영능력을 평가받지 못했던 최 회장의 가슴앓이가 SK하이닉스 출범으로 끝난 것이다. 2차 석유파동을 맞아 진출 3년만에 철수했던 그룹의 반도체 사업 재건이라는 의미도 최 회장에게는 각별하다.
그룹 입장에서는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인수 이후 첫 번째 초대형 M&A의 성공이며 유공 인수 이후 첫 제조업 진출이다. 특히 내수기업이라며 평가절하됐던 그룹 이미지도 이제는 어엿한 글로벌기업 반열에 들었다.
출발도 좋다. 최근 몇 년 사이 대형 M&A에 성공한 기업들이 아직까지도 인수한 회사 이름 하나 바꾸지 못하고 있는 데 반해 하이닉스는 곧바로 SK브랜드를 내걸었다. 게다가 돈을 들여서라도 SK하이닉스라는 브랜드를 홍보해야 한 판에 때마침 매물로 나온 엘피다 인수전에 참여하면서 전 세계 언론의 관심을 받고 있다. 엘피다 인수 여부를 떠나 자연스러운 홍보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웃기에는 아직 이르다. SK하이닉스에는 현대그룹 특유의 터프한 조직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다. 현대그룹 분리 이후 경영난 등의 어려움 속에서도 높은 영업이익과 함께 회사를 지켜냈다는 직원들의 자부심도 어느 회사보다 높다. 때문에 SK그룹 인수 이후 많은 직원들은 반색하기보다 지켜보자는 유보적인 태도다.
최태원 회장의 경영능력 평가는 이제부터다. SK하이닉스에 SK 문화를 성공적으로 접목시키는 한편 최근 대형 M&A 성공기업들이 시달렸던 승자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직 최 회장의 경영능력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여년 가슴에 맺혀 있던 최 회장의 깊은 한(恨)을 SK하이닉스에서 어떤 경영성과로 풀어낼지 한층 관심이 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