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 총선 이후 정치권의 ‘대기업 옥죄기’는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여론도 이같은 정치권의 움직임을 반기는 모습이다. 이는 대기업이 규모에 걸맞은 사회적 책임을 이행해야 함에도 ‘덩칫값’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최근 대기업들이 막강한 자본력과 대규모의 시설, 종업원을 바탕으로 중소기업들이 진출하기 힘든 자동차, 철강 등 다소 규모가 큰 분야에 진출해 있다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별별 ‘소일거리’를 하고 있어 눈총을 사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 2월 28일 발표한 ‘대기업집단 계열회사 변동 현황’에 따르면 대기업들은 중기업종 등 닥치는 대로 문어발식 확장을 하고 있다. 상호출자가 제한되는 35개의 대기업집단의 계열사는 2007년 4월 812개에서 2011년 4월 1205개로 불과 4년 만에 2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는 대기업 집단별로 연평균 2.8개씩 계열사를 늘린 셈인데 그만큼 다양한 업종에 진출했다는 의미다.
대기업들은 실제로 중기업체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업종에 진입하고 있다. 공정위의 조사 결과 35개 대기업집단 중 22개의 대기업이 커피베이커리, 교육 서비스업, LED램프, 대형마트, 상조, 해외 명품 수입, 수입차 판매 등에 계열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중기업종 침해 계열사는 전체 1282개 중 5.8%인 74개 기업에 이른다. 특히 중소기업 분야 진출이 많은 대기업은 삼성·신세계(7개), 롯데·GS(6개), CJ·효성(5개) 등이다.
정중원 공정위 경쟁정책국장은 “대기업집단이 계열사를 많이 늘린 것도 문제지만 핵심은 이 과정에서 총수 일가가 중소기업 영역을 잠식하거나 사익을 추구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밥집’의 경우도 대기업의 손길이 뻗치고 있다. 대기업들은 한식, 분식, 일식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외식업에 진출해있다. 고(故) 구인회 LG 창업주의 3남인 구자학 회장이 의 1남3녀가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아워홈의 경우 ‘밥이 답이다’ ‘손수헌’ 등의 식당을 운영 중이고 캘리스코를 통해 돈까스 전문점인 ‘사보텐’을 관리하고 있다. 씨푸드와 일본라면을 파는 ‘하코야씨푸드’와 ‘하꼬야’ 또한 LG패션의 자회사 LF푸드가 서비스하고 있는 매장이다.
서민들이 점심값을 아끼기 위해 사먹는 편의점표 도시락과 김밥, 샌드위치도 예외는 아니다. 롯데는 편의점 식품제조 전문 업체 ‘롯데후레쉬델리카’를 통해 삼각김밥, 햄버거 등을 제공하고 있다.
식음료 업종 뿐만 아니라 교육 사업에도 이미 대기업은 진출해있다. 현대자동차는 입시연구사와 종로학평을 계열사로 가지고 있다. 입시연구사는 입시 전문 학원인 종로학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종로학평은 수험서를 출판하는 곳이다. 현대자동차가 직접 학원 사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사위인 정태영 현대캐피탈 사장이 부친에게 입시연구사와 종로학평 지분을 증여받으면서 계열사로 편입됐다.
대기업들이 자본을 투자한 분야에서 말썽을 일으키기도 한다. 최근 요금 인상 요구로 논란이 일고 있는 ‘서울시 메트로9호선’과 메트로9호선의 대주주인 ‘현대로템’도 현대자동차의 계열사이다.
이밖에도 SK, LG, 롯데, GS 등 18개 회사들이 수입품유통업에, CJ, SK 등 2개사가 웨딩서비스업에 진출해 있다. 아울러 중소기업중앙회가 조정 신청 중인 업종에 소모성자재 구매대행(MRO), 대형마트, 기업형 슈퍼마켓(SSM), 상조업 등에 손을 대고 있는 상황이다.
공정위에 따르면 총수 2~3세가 직접 지분에 참여하거나 경영을 하면서 중소기업 분야에 진출한 곳은 8개 대기업집단 소속 17개 회사다. 대기업 집단별로는 롯데 5개, 삼성 4개, 현대차 3개 등의 순으로 많았다. 업종별로는 식음료소매업(8개), 수입품유통업(5개), 교육서비스업(2개) 순이었다.
이처럼 재벌 2~3세가 중기업종에 진출한 대표적인 예는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딸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이다. 신 사장은 시네마푸드와 시네마통상을 통해 전국 15개 롯데시네마 매장에서 팝콘과 음료를 팔고 있다.
삼성에버랜드도 식자재유통 사업을 벌이고 있다. 삼성에버랜드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 개인 최대 주주인 곳으로, 식자재유통 사업은 중소기업 사업조정신청 분야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슬하의 3남매도 대한항공 기내면세품을 인터넷으로 판매하고 있는 싸이버스카이의 지분을 3등분해 가지고 있다. 싸이버스카이는 중소기업 영역 진출회사에 포함된 상태다.
◇철수하겠다고 한 지가 언젠데…소상공인들 피해만 커져=대기업들의 무분별한 업종 확장에 사회적 여론이 부정적으로 흘러가자 대기업들은 중기업종에서 철수를 선언했다.
LG 계열사 아워홈은 식품브랜드 ‘손수’를 통해 순대와 청국장을 판매해왔지만 지난해 동반성장위원회의 순대·청국장 사업 확장 자제 권고안을 검토한 결과 사업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역시 베이커리 ‘오젠’ 사업을 모두 철수했고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외손녀 장선윤씨가 운영하는 블리스도 매각을 위해 관련 중소기업들과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 철수를 공언했지만 아직까지 버젓이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기업들도 있다.
LG는 MRO사업을 진행하는 LG서브원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LG는 지난해 8월 “MRO사업에 관해서는 우리 사회에서 여러 각도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므로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는 대로 그 방향에 맞추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으나 사회적 합의와는 반대로 사업을 지속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삼성의 경우도 커피·베이커리 브랜드인 아띠제의 사업 철수를 결정했지만 아직까지 아띠제를 운영 중이다.
삼성 고위관계자는 “사업철수라는 게 한 순간에 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차근차근 정리하고 있다”면서 “순차적으로 사업을 접을 것이며 말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기업들의 철수가 늦어지면서 관련 소상공인들의 피해도 커져가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2003년 1만8000여 개에 달했던 자영업자 빵집은 지난해 말 4000개로 줄어들었다. 외식업에서도 작년 상반기에만 2만6615개의 식당이 폐업하는 등 피해가 심각하다.
이러한 대기업들의 무리한 업종 확장에 재계 관계자는 “대기업은 사회적·경제적 영향력이 막대한 만큼 사업을 확장할 때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지 먼저 고민해야 한다”며 “계열사 확장을 통해 소상공인들의 숨통마저 조일 정도로 중기업종에 진출한다면 결국 사회 전반적인 반 대기업 정서는 더욱 강해지고 정치권의 재벌 개혁 목소리가 더욱 커지는 결과 만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