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금융권에 대한 규제가 강화하는 가운데 대형은행의 분할론이 부상하고 있다.
유로존(유로 사용 17국) 재정위기가 심화하면서 미국발 금융위기 때와 같은 상황이 되풀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자 대형은행에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 부문을 쪼개 리스크를 줄여야 한다고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선봉에 선 것이 씨티그룹을 거대 상업·투자 은행으로 키운 샌포드 웨일 전 최고경영자(CEO)다. 그는 지난 25일(현지시간) 미국 방송 CNBC와 인터뷰에서 “지금 사는 세계는 10년 전과는 다르다”며 “슈퍼마켓형 은행은 이미 제기능을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리스크가 큰 투자은행 업무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상업은행 업무에서 떼어내고, 정부는 상업은행만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웨일 전 CEO는 1990년대 후반 당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 부문을 분리하던 ‘글래스 스티골(Glass-Steagall)’법을 폐지시키는데 앞장서 대마불사로 일컬어지는 ‘금융 콘글로메리트(conglomerate)’를 탄생시킨 인물이다.
씨티그룹은 그의 지휘 하에 글로벌 은행으로 성장했으나 금융위기 여파로 45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받고 기사회생했다. 이번 발언은 그의 지론을 180도 전환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미국 대형은행들은 대부분 투자은행과 상업은행 부문을 병행하는 대형 ‘슈퍼마켓형 은행’ 형태를 갖추고 있다. 금융위기 당시 이들은 경영 위기로 파산 지경에 처했지만 무너질 경우 파급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해 살려뒀다.
은행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헤지펀드 콘섹터캐피털의 빌 블랙 파트너는 로이터통신에 “모든 대형은행은 각 업무가 통합된 것보다는 분리되는 쪽이 존재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며 “소규모로 특정 사업에 전념하는 은행이 투자자를 유치하기 수월하고 규제 당국을 만족시켜 침체된 주가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주장이 힘을 얻는 것은 미국 은행권이 우려할 정도로 심각한 어려움에 처했기 때문이다.
미국 대형은행의 지난 2분기 순이익은 10개 은행 중 7개 은행이 시장의 예상을 웃돌았다. 문제는 순이익 대부분이 비용 절감과 부실채권 비용을 줄여 생겨난 것으로 주요 사업 호조에 힘입어 늘어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출, 트레이딩, 고객사의 합병·인수(M&A) 관련 매출은 여전히 부진하다. 계속되는 저금리 기조로 대출이나 다른 투자에서도 수익성이 압력을 받고 있다.
30년간 은행을 분석해온 앤시 부시 애널리스트는 로이터통신에 “현 시점에서 경제가 본격적으로 개선되거나 대출이 급증하지 않으면 은행에 투자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에서 금융론을 강의하는 로이 스미스 교수는 “중요한 것은 은행이 보다 경영을 잘 하기 위해선 규모를 축소해야 한다는 점”이라며 “서로 연관성이 없는 사업을 포함하는 유니버설은행이 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저금리 기조가 장기화하면서 은행의 재무 상태에도 막대한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미 정부 자료에 따르면 6월 상업은행의 대출은 전년 동월 대비 5.3% 증가했다. 대출은 10개월 연속 증가했다.
그러나 저금리로 우량 고객 쟁탈전이 심화하면서 수익성은 이전에 비해 떨어졌다는 지적이다. 연내에 모기지 차환 붐이 사그라들 경우 상황은 더 악화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7위 상업은행인 US뱅코프의 경우 2분기 순익이 17% 늘었지만 대부분은 모기지 차환에서 발생한 것이다.
더 암울한 것은 대출 성장세가 예금 성장세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에 따르면 2010년 3월 시점에서 은행은 들어온 예금의 약 99%를 대출했다. 그러나 올 3월 시점에서 그 비율은 77%가량으로 10년래 최저로 떨어졌다.
이런 총체적 난국 상황에서는 투자은행 부문을 갖고 있는 대형 상업은행 뿐만 아니라 골드만삭스같은 투자은행 전문 금융기관도 위태로울 것이라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미국 의회에서는 금융권에 대한 규제 강화와 함께 이미 대형은행 분할 관련 입법이 추진되고 있다.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민주당 의원인 브래드 밀러는 “대형은행의 규모를 제한하는 법안을 마련하고 있다”면서 “주주들이 얼마나 많은 지지를 보내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토머스 호닉 전 캔자스시티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글래스 스티골법의 폐기가 잘못됐다는 인식이 애널리스트와 투자자, 정책 입안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확산하고 있다”면서 “은행이 핵심 사업에만 전념토록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의 민주당 의원인 캐럴린 맬로니는 티머시 가이트너 미 재무장관에게 글래스 스티골법이 존재했다면 2008년 금융위기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를 구체적으로 분석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