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이사께서 세탁기, 냉장고 등 생활가전분야도 1등하라고 하시니 부담이 되네요.”
지난 1월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인 ‘CES 2012’가 열린 미국 라스베이거스 인근의 한 식당에서 만난 윤부근 삼성전자 소비자가전(CE)담당 사장은 생활가전 사업부를 맡게 된 소감에 대해 웃음을 띠면서 이같이 말했다.
전자업계의 독보적인 1위임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 생활가전 사업은 경쟁사에 비해 탁월한 성과를 올리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당시 삼성전자 대표이사였던 최지성 부회장이 꺼내든 카드는 윤부근 사장이었다. ‘보르도 TV 신화’로 유명한 윤 사장의 1등 방정식이야말로 고전하고 있는 생활가전사업분야를 도약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
최 부회장의 이같은 바람은 현실로 나타났다. 윤 사장이 생활가전사업부를 맡은 뒤 7개월만에 나타난 신작 ‘지펠 T9000’은 출시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역시 윤부근’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에 앞선 지난해 12월. 삼성그룹은 연말 정기 사장단 인사를 통해 제일모직 신임 사장에 박종우 삼성전기 대표이사를 선임했다.
전기·자분야 전문가가 ‘패션사업’의 대명사인 제일모직 대표이사로 선임된 것에 대해 많은 억측을 낳았다. 하지만 주력사업으로 육성중인 전자재료와 화학 사업 육성을 위한 적임자로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낙점을 받은 것.
제일모직은 지난 2분기에 매출 1조5310억원, 영업이익 1030억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제일모직 내부에서도 ‘효율성’과 ‘스피드’를 바탕으로 한 박종우 대표의 ‘삼성전자 DNA’가 제일모직에도 빠르게 이식된 것이 단기간 경영성과로 나타났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최근 재계에서는 한 기업에서 혁혁한 성과를 올린 CEO들을 다른 계열사로 발령내면서 성공스토리를 이어가도록 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미 검증된 경영능력을 다른 계열사에서도 발휘하기 바라는 그룹 최고경영진의 의중이 담긴 인사로 해석된다.
지난해 말 LG그룹 사장단 인사에는 파격적인 내용이 포함됐다. LG디스플레이 대표이사였던 권영수 사장이 LG화학 전지사업본부장을 이동한 것.
기업규모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대표이사 출신이 사업본부장으로 발령나면서 ‘좌천’이 아니냐는 해석이 분분했다.
LG 관계자는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면 물러나지 않았겠느냐”며 “LGD에서의 성공노하우를 그룹 차세대 주력사업인 2차 전지사업에서 발휘해달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SK그룹에서도 김신배·정만원 부회장이 성공 DNA 전파자의 대표사례로 꼽힌다. 국내 이동통신사업 1위를 이끌었던 김신배 부회장은 지난 2009년 SKC&C로 옮겨, 주식시장 상장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또 SK네트웍스의 워크아웃 조기졸업이라는 성과를 거둔 정만원 부회장은 이후 SK텔레콤 사장으로 옮겨 스마트폰 시장에서 고전하던 SK텔레콤에서 ‘갤럭시S’를 론칭, 스마트폰 사업에서도 국내 1위 사업자로 지위를 재탈환하는 데 기여했다.
이처럼 SK그룹이 재계 서열 3위에 오르기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한 두 사람은 현재 SK(주) 부회장단 소속으로, 그룹 전반에 대한 업무를 총괄하며 그들의 성공 DNA를 그룹 전사적으로 전파하고 있다.
하지만 ‘성공 DNA’ 이식에 대한 부작용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고 다른 업무도 잘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재계 고위 임원은 “자신의 전공과 무관한 분야에서 일을 하면서 성과를 못내다보면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며 “이 경우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회사를 떠나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고 전했다.
더 나아가 유명을 달리한 사례도 있었다. 삼성그룹 내 최고인재 중 한 명이었던 고 이원성 삼성전자 부사장이 주인공. 서울대, 카이스트, 스탠포드대 등을 나온 그는 국내 반도체 분야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연구개발에만 몰두한 그는 삼성전자가 반도체 세계 1위 자리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면서 삼성그룹내 연구기술직 최고의 영예인 ‘삼성펠로우’에 선정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연구·개발 전문가였던 그가 갑자기 기흥 공장장으로 발령이 나면서 받은 과중한 스트레스로 인해 결국 유명을 달리하는 비극이 발생키도 했다.
재계 관계자는 “성장이 정체됐거나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한 기업의 경우 성공한 CEO의 능력을 적극 활용하기 위한 노력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