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위기에 빠진 일본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를 구출하기 위해 일본 제조업계의 간판 기업들이 뭉쳤다.
도요타자동차·파나소닉 등 대기업들이 해외 사모펀드에 넘어갈 위기에 처한 르네사스에 3자 배정 방식으로 1000억 엔(약 1조5000억원)을 출자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2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출자에는 도요타와 파나소닉 외에 닛산·혼다·캐논 등 일본의 간판 기업들과 경제산업성 산하 구제기금인 산업혁신기구도 참여한다. 경영난에 처한 부품 업체를 구하기 위해 다른 업종의 기업들이 거액의 자금을 모으는 것은 일본에서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르네사스가 해외 자본에 넘어갈 경우 일본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다.
르네사스는 자동차와 디지털 가전제품의 두뇌 역할을 하는 마이크로컴퓨터를 공급하는 일본 최대 비메모리 반도체 기업이다.
르네사스는 작년까지 7년 연속 적자행진에 이어 내년 3월 끝나는 2012 회계연도에도 1500억엔의 적자가 예상된다.
LCD TV 등 음향·영상 기기용 고기능 반도체의 시스템 대규모 집적회로(LSI) 부진이 적자의 주요인이지만 점유율이 높은 마이크로콘트롤러에서 충분한 수익이 나지 않는 것도 문제다.
르네사스는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직원 5500명에 대한 조기퇴직을 단행하고 일본 내 19개 공장을 매각·폐쇄하는 대규모 구조조정을 벌이고 있다. 이에 따른 비용은 르네사스의 3대 주주인 NEC·히타치제작소·미쓰비시와 미쓰비시도쿄UFJ 등 주요 거래은행들이 내놓은 1000억 엔의 협조융자로 조달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적 전망이 개선되지 않자 르네사스는 외부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방안을 모색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달 미국 대형 사모펀드인 콜버그 크라비스 로버츠(KKR)가 르네사스의 인수를 타진했다. 경영 정상화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한데도 1000억 엔을 출자한다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이 소식은 르네사스로부터 부품을 받아 써 온 기업에는 청천벽력이다. KKR 산하에서 르네사스가 납품 가격을 올릴 경우 자동차 등 제품의 비용이 늘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와 3대 가전 주주들은 자국 반도체 산업의 마지막 보루인 르네사스가 기술 개발과는 관계없는 글로벌 펀드 투자회사에 넘어가면 일본 제조업 전체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이 발동, 비상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일본 반도체 업계는 한때 세계 시장에서 우위를 점했으나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 한국·대만이 약진하고, 비메모리 부문에서 미국 인텔이 시장을 지배하면서 존재감을 거의 상실한 상태다.
NEC·히타치제작소·미쓰비시전기가 2003년 메모리 반도체 부문을 통합해 출범시킨 엘피다메모리는 4480억 엔의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올 2월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설립 모체가 엘피다와 같은 르네사스는 일본 반도체의 마지막 보루였던 셈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자동차 업체 등 주요 고객사 사이에서는 하청의 입장에 만족해온 르네사스가 국제 시세에 맞춰 마이크로컴퓨터 등의 가격 인상을 단행할지에 대한 경계심이 강했다”고 말했다.
르네사스는 일본에서 마이크로컴퓨터의 50%를 공급하고 세계적으로도 30%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기업이 투자회사에 넘어가면 기술 유출 우려는 물론 안정적인 부품 조달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KKR은 인수 조건으로 르네사스 경영진의 총사퇴를 내건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