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눈 뜨고 일어나면 세상이 바뀌어 있다. 기업 현안을 챙기기보다 사정 당국의 동향을 파악하는 게 일상이 돼 버렸다”며 토로했다. 김 상무는 “당국이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기업 사정에 나선 것은 직장 생활 20여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재계가 사상 초유의 사정 바람에 휩싸였다. 검찰, 국세청, 관세청, 금융감독원, 공정거래위원회 등 사정·감독당국이 동시다발적으로 대대적인 조사에 나섰기 때문이다.
31일 재계 등에 따르면 비자금 조성·역외탈세·횡령 혐의 등 대기업 오너들의 개인 비리에서부터 다음 달 임시국회 통과를 줄줄이 대기 중인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까지 각종 악재가 겹쳐 긴장감이 극에 달하고 있다.
재계는 검찰의 CJ그룹 조사를 이번 사태의 분수령으로 보고 있다. 최근 검찰은 이재현 회장의 비자금 조성 통로인 수 백 개의 차명 의심 계좌를 발견하고, 30일 금감원에 특별검사를 의뢰했다. 앞서 검찰은 우리은행 관계자들을 잇따라 소환해 CJ그룹 측의 차명계좌와 관련한 조사를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금감원은 검찰이 의뢰한 은행과 증권사 등 5곳의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금감원은 또 인터넷 언론 뉴스타파의 조세피난처 이용 한국인 명단 공개와 관련해 역외 탈세 혐의가 제기된 이수영 OCI 회장 등 12명과 이들이 속한 기업의 주주명부 등을 확보해 조사에 들어갔다. 문화·교육계 혐의자에 대해서도 거래 내역을 확보해 외환거래법위반 여부를 점검할 방침이다.
국세청은 지난 29일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 조세피난처의 페이퍼 컴퍼니(서류로만 존재하는 유령회사)를 이용한 세금 탈루 혐의자 23명에 대해 일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국세청은 이날 효성그룹에 조사 요원을 투입해 회계장부를 확보했고, 다음 날인 30일에는 한화생명 본사에서 내부 보고 문서와 결재서류 등을 확보했다. 이들 기업의 공통점은 최근 재벌닷컴과 뉴스타파가 공개한 조세피난처 법인 보유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국세청은 한화그룹의 역외 탈세와 비자금 조성 혐의를 포착하고 전방위 세무조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공정위는 최근 유통과 광고 업계의 하도급거래 조사에 나선 상태이며, 관세청은 다음 달 1일부터 연말까지 조세피난처와 불법 외환거래를 통한 자본 유출과 역외 탈세 혐의가 있는 수출입 기업에 대해 일제 조사에 착수할 예정이다.
사정·감독당국이 집중 포화를 받고 있는 재계는 좌불 안석이다.
재계 한 고위 관계자는 “상당히 곤혹스럽다”며 최근의 심경을 한 마디로 요약했다. 그는 “글로벌 경쟁력 제고에 힘써야할 중요한 시점인데 본연의 기업 활동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며 “사방이 꽉꽉 막혀 있다”고 하소연했다.
재계의 다른 관계자는 “일부 기업들의 불법 행위나 도덕적인 문제를 기업들 전체의 문제로 보고 접근하려 해서는 안된다”며 “사정·감독 기관들이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기업들을 조준하고 있고, 불확실한 소문과 정보만 무성해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