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F(사모투자전문회사)가 국내 인수합병(M&A) 업계의 큰손으로 성장했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이후 기업 구조조정 매물이 증가하고 저성장·글로벌 경기불황 지속으로 기관투자자들이 대체투자 수단인 PEF에 대한 투자를 확대했기 때문이다. 지난 2004년 말 국내시장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이후 9년 만에 42조원 시장으로 성장한 PEF의 빛과 그림자를 들여다본다.
◇15개에서 234개로 폭풍 성장=국내 PEF는 2004년 12월 옛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간투법)에 제도 근거가 명시되며 출범했다. 국내 PEF 규모는 약정액 기준 2005년 말 4조7000억원에서 지난 8월 말 42조5000억원으로 9배나 늘어났다. 같은 기간 PEF의 숫자도 15개에서 234개로 16배 증가했다. 지난해 PEF가 모집한 자금은 9조7000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PEF가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이들 기업에 지속적으로 자금이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저금리와 경기불황이 지속되며 대형 연기금 등 기관투자자들이 투자수익률 저하를 막기 위해 전통적 투자수단인 주식·채권보다 대체투자 수단인 PEF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국민연금, 정책금융공사 등 기관투자자들은 PEF 신규 유입자금의 47%에 해당하는 4조6000억원을 출자했다.
시장 규모가 커지면서 조단위의 돈을 굴리는 대규모 PEF도 등장했다. PEF 가운데 가장 큰 곳은 KDB산업은행이 운영하는 산은 PE다. 지난 8월 기준 산은 PE는 약정액 기준 5조7000억원가량의 자금을 굴리고 있다. 은행이 아닌 독립계로는 MBK파트너스가 5조3000억원, 미래에셋이 2조3000억원, 보고인베스트먼트가 1조억원 규모의 자금을 운용 중이다.
이들 PEF는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M&A와 기업 구조조정 시장에서 주요 기업들의 경영권을 인수하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변양호 전 재경부 금융정책국장이 이끄는 보고펀드는 지난 2006년 노비타를 시작으로 동양생명, 비씨카드, LG실트론, 버거킹 등을 차례로 인수했다. 보고펀드와 함께 대표적 토종 PEF인 MBK파트너스도 C&M, 코웨이, 네파 등 대규모 M&A를 성사시켰다. 미래에셋PE는 골프용품 제조사 아큐시네트 경영권을 인수한 데 이어 최근 미국계 커피체인점 커피빈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
김앤장 법률사무소 박종현 변호사는 “PE(사모투자)의 본질은 잠재돼 있는 매물을 발굴하고 밸류(기업가치)를 높여 산업 전반에 도움이 되는 기업으로 키우는 것”이라며 “상시 구조조정에 따른 사회적 비용 감소와 M&A 시장 활성화 등 긍정적인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엑시트 환경 악화 등 장애요인도=규모가 커진 만큼 국내 PEF의 고민도 많다. PEF는 자금의 특성상 M&A나 기업공개(IPO)를 통해 투자금을 회수(엑시트)해야 한다. 하지만 최근 경기악화와 증시 부진, M&A와 IPO시장 침체로 엑시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해 PEF의 투자금 회수액은 2조1000억원으로 전년 대비(3조8000억원) 1조7000억원 감소했다. 실제로 보고펀드는 동양생명 매각에 실패했고, MBK는 케이블TV 업체인 C&M과 HK저축은행 등의 매각에 애로를 겪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어려움이 PEF의 평판 하락으로 이어져 향후 추가 자금모집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바이아웃(경영권 인수)을 통한 기업가치 제고라는 제도 도입 취지와 달리 국내 PEF가 안정 지향적 투자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융감독원은 ‘2012년 PEF 동향’ 보고서를 통해 “기관투자자의 손실 방어 투자 성향이 사모펀드 시장에 광범위하게 반영돼 있다”며 “경영권 인수 투자가 가능한 전문인력 양성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우리금융연구소 이장균 책임연구원도 “국내시장은 기관투자자의 영향력 확대, 손실방어 투자 성향 등으로 인해 프로젝트 PEF(투자대상을 사전에 확정한 후 투자자를 모집)가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라며 “GP(펀드 운용사) 평판 시장이 형성된 해외의 경우 블라인드 PEF(투자대상을 확정하지 않고 투자자 모집)가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밝혔다.
자금력이 뛰어난 해외 PEF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투자전략과 해외투자 역량 강화 등 자생력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 연구원은 “국내 PEF가 M&A 시장에서 해외 PEF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단독 투자보다는 전략적투자자(SI)와의 컨소시엄 구성·국내 PEF 간의 공동투자 등을 통해 자금력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며 “투자기회에 한계가 있는 국내 시장보다 해외에서 투자 기회를 발굴해 해외투자 역량을 보다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