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論]일본 주택정책에서 찾는 의료 해법- 이우광 전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입력 2014-01-13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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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미국과 달리 슬럼가가 없다. 재개발을 열심히 추진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도쿄의 재개발은 ‘록본기 힐즈’처럼 주로 도심에서 진행되고 우리처럼 변두리 지역의 대단위 재개발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쿄에는 딱히 슬럼가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은 없다. 현재 대다수의 일본 국민들은 문화적ㆍ위생적으로 큰 문제없이 크고 작은 주택에서 살아가고 있다. 왜 일본에는 슬럼이 없을까? 그 배경을 파헤쳐 보면 최근 우리 사회에서 불거지기 시작하는 의료문제에 대한 해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전후 베이비 붐 세대가 성인이 될 즈음인 1970년대를 전후하여 주택 수요가 폭발하였다. 이 시기에 일본 정부는 공공주택을 대량으로 공급하여 수요 급증에 대응하였다. 공공주택을 목조로 짓기도 하고 또 콘크리트 건물이라 해도 엘리베이터도 없는 집합주택이었다. 물론 평수는 좁고 화장실도 변변치 않았다. 과거 우리의 ‘시민아파트’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하지만 위생상태가 나빠서 전염병이 만연한다든지, 일반주택에 사는 사람보다 평균수명이 짧아졌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다. 쾌적성은 좀 떨어지지만 공공주택에서도 생존권이 보장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본 중산층들은 공공주택에 살기보다는 보다 쾌적한 생활을 하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아 쾌적한 민간주택으로 옮겨갔다. 공공주택 공급 때문에 일반주택 시장질서가 결코 저해되지 않았다. 공공주택을 고급스럽게 짓지 않았기 때문에 도덕적 해이도 없었다. 일본국민들은 생존권보다도 쾌적성을 더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생존권을 적절하게 보장할 수 있을 정도의 공공주택 공급정책이 성공한 것이다.

의료복지 문제도 이와 비슷한 구조가 아닐까 생각된다. 고령화 사회 진전으로 의료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급증하고 있다. 급증하는 수요에 대해 정부는 재정 제약 때문에 국민들이 원하는 의료서비스를 전부 제공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정부는 일본의 공공주택처럼 국민의 최저선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수준의 의료서비스에 대해서는 정부가 어느 정도 부담을 하고, 쾌적한 민간주택에 살기 위해 개인이 부담을 하는 것처럼, 보다 쾌적한 의료서비스를 원하는 국민에 대해서는 개인이 더 부담하도록 하는 것이 급증하는 수요에 대처하는 현명한 방안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실적으로 의료서비스를 받는 수익자의 부담보다도 의료서비스 공급자에게 더 많은 비용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의료서비스 전반에 대해 가격 등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의료서비스 공급자(의사, 간호사, 복지사 등의 인건비 등) 비용의 상당 부분을 결국 정부가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현행 제도로서는 의료서비스 공급자는 수요증가에 대해 병원의 능력이 따라가지 못해 저임금ㆍ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하고, 정부는 재정제약 때문에 이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고, 또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쾌적한 의료서비스를 원하는 수요자들의 니즈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정부의 실패’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제도 도입을 시장만능주의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실제로 고령자 중에는 재산을 가진 자들이 많으며, 고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쾌적한 의료서비스를 원하는 수요가 상당히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수요와 공급의 밸런스를 정부의 개입으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 의료시장에 시장원리를 도입하면 부자는 고도의 의료서비스를 향유할 수 있으나 돈이 없는 많은 국민들은 만족스런 서비스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은 말은 좋지만 공급자 측의 ‘워킹푸어’ 문제와 재정부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주장은 아니다. 따라서 국민들의 생존권을 훼손시키지 않고 최저선의 의료서비스를 보장하면서, 쾌적한 의료서비스를 원하는 자들로부터 더 많은 돈을 받아 공급자 측의 수입을 늘려주는 공급의 ‘베스트믹스’ 정책이 재정적자도 최소화하는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장만능주의를 주장하거나 정부개입의 필요성만을 주장하는 2원론적 논쟁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한낱 불모론에 불과하다.

사실 일본도 주택정책은 성공했지만 의료정책에는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해결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연금ㆍ의료 등 복지 관련 예산이 폭증하여 국가채무가 GDP 대비 230%로 선진국 최고이다. 지금 일본은 빚을 자식 세대에게 떠넘기고 있다. 복지나 의료문제는 주택문제보다 훨씬 복잡하고 또 이해관계도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해결 방안을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무엇이 문제의 본질이고 어떻게 하면 해결 가능한지 진심으로 고민하는 논쟁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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