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 회장님 귀국에 대해 이렇다 할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저희도 회장님이 현재 머무르는 곳이 미국이라는 것 밖에는 모릅니다. 일단은 건강 부분이 중요하니까…." (삼성그룹 구조본 한 관계자)
2005년이 저물고 있는 요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귀국시점에 대해 회사측은 "특별한 계획이 없다"며 일단 올해를 넘기지 않겠느냐는 뉘앙스로 조심스럽게 답했다.
이건희 회장이 미국에 머물고 있는지 벌써 4개월 째로 접어 들었다. 특히 올해에는 이 회장이 귀국하기 힘들 것이라는 주장이 그룹 안팎에 팽배해 있다.
'암 재발 여부' '안기부 X 파일' '지배구조 논란' '막내딸의 자살' 등으로 코너에 몰릴 대로 몰린 이 회장의 입장에선 선뜻 국내로 돌아오기 힘들지 않겠느냐는 전망이다.
◆이건희 회장 공백 누가 메우나; 이재용 vs 이학수
그렇다고 이건희 회장이 그룹 경영에 완전히 손을 놓고 있는 상태는 아닌 것으로 파악됐다. 이 회장은 이학수 삼성그룹구조본부 본부장과의 '핫라인'을 통해 경영현안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에버랜드 관련 편법증여'와 '안기부 불법 도·감청 사건'에 대한 검찰의 조사의 방향에 대해보고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측에서는 부인하지만 재계 일각에선 '이건희 회장의 공백'을 메울 인물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와 이학수 본부장을 떠올리고 있다.
과거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암 수술을 받으러 일본으로 가기 직전에 후계자로 이건희 회장을 지명했던 한 세대 전의 상황을 따져 볼 때 이 상무의 역할 확대 가능성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내년 초에 있을 정기인사에서 이 상무의 '전무' 승진 설도 솔솔 나오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 상무는 1968년생이니 올해로 서른여덟이다. 내일 모레면 불혹이다. 그래도 그동안 이건희 회장의 그늘에 갇혀 있어 ‘배우는’ 후계자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동안 이 상무 본인은 스스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부친인 이건희 회장을 비롯해 구조본 소속의 이학수 본부장, 김인주 사장, 김준 비서팀장, 이순동 홍보팀장 등이 엄격한 선생님이자 ‘종가 집 살림을 가르치는’ 시어머니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구조조정본부는 그의 수족인 동시에 아이러니컬하게도 관리·감독기구다. 구조본은 이 상무가 개인적인 친분을 나누는 사람까지 일일이 파악한 후 계속 관계를 유지할지를 결정할 정도로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번 이건희 회장의 장기간 외유로 이 상무의 운신 폭이 상당히 넓어졌다는 주장이다.
이재용 상무의 경영전략 그룹실은 서울 중구 태평로 소재 삼성본관 빌딩 25층에 위치한다. 바로 위층인 26·27층에는 삼성기업구조조정본부(구조본)가 있고 28층에 이건희 회장의 집무실이 있다. ‘물리적’ 위치로만 봐도 이 상무의 ‘상징적’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한눈에 파악된다.
이 상무는 25층 집무실에 오전 8시전에 출근해서 오후 5~6시경 퇴근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 회장의 장기간 외유이후 퇴근이 늦어지고 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현재 구조본 간부들에게 수시로 이메일 보고를 받고 있다.
알려진 바로는 이 상무는 사무실에서만 이메일 보고를 받는 것이 아니다. 이 상무가 타는 현대 에쿠스에는 첨단모바일 시스템이 깔려 있어 승용차로 이동 중에서도 긴급한 이메일 보고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는 비상체제라 새벽에도 이메일 보고를 보내고 읽어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학수 본부장과는 때때로 식사를 같이하면서 그룹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 회장의 결재를 받기 위해선 반드시 이학수 부회장의 ‘선(先) 결재’를 거쳐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황태자로 낙점 받은 이재용 상무는 아직 그룹 장악력 측면에선 이학수 본부장을 넘기엔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건희 회장이 자리를 비운 삼성그룹은 현재 이학수 부회장체제로 굴러간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 재계의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