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26일 오전(한국시간) 거짓말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갑작스런 죽음. 만 50세의 마이클 잭슨은 50회에 걸친 대형 컴백 무대를 한 달 가량 앞두고 돌연 죽음을 맞이했다. “런던 콘서트는 나의 마지막 쇼다. 정말 마지막 커튼콜이 될 것이다.” 그가 공언한 마지막 쇼는 결국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그의 마지막 쇼를 기다리던 전 세계인은 갑작스런 비보로 슬픔 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5년이 지났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지난 5월 마이클 잭슨의 미발표곡을 모은 앨범 ‘엑스케이프(XCAPE)’이 발매됐다. 이 앨범은 공개되자마자 49개국 아이튠즈 앨범 차트 1위를 석권하고, 82개국에서 5위권 안에 진입했다. 그는 사후에도 역사를 써내려갔다.
그는 전설이었다. 1982년 발매된 ‘스릴러(Thriller)’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록됐고, 그는 13번의 그래미 상, 그래미 공로상과 그래미 레전드 상, 26회의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상 등 수 백 개에 이르는 상을 받으며 역사상 가장 많은 수상을 한 음악가로 기네스에 등재됐다.
마이클 잭슨은 자신에게 주어진 지대한 영향력을 아름답게 사용할 줄 아는 아티스트였다. 그가 내딛은 발자국에는 아름다운 향기가 짙게 묻어 있었다. ‘힐 더 월드(Heal the Wolrd)’,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 ‘데이 돈 케어 어바웃 어스(They Don’t Care About Us)’ 등의 곡을 통해 전쟁으로 변하는 세계에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인종차별과 학대 등을 반대했다.
그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수익을 남긴 1984년 ‘빅토리 투어(The Victory Tour)’의 이익금 전액을 자선단체에 기부했고, 1992년 ‘힐 더 월드 파운데이션(Heal The World Foundation)’을 설립해 자선기부와 전쟁으로 인한 피해 지역 구호, 불치병 환자 치료 등에 앞장섰다. 이외에도 39개의 자선단체를 후원한 그는 2000년 기네스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화려한 음악 인생과 아름다운 그의 영향력만큼 그를 가리는 그림자도 짙었다. 그는 백인이 되고 싶어 피부를 박피했다는 둥 성형중독이라는 둥의 악성루머에 시달려야 했고, 아동 성추행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만장일치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는 세계적인 팝스타라는 이유로 언론과 여론의 근거 없는 손가락질을 감내해내야 했다.
굴곡진 인생을 살던 그는 사후 역시 전설로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그는 비단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고, 노래한 뮤지션이 아니다. “바로 알 수 있는 목소리, 깜짝 놀랄만한 댄스, 굉장한 음악적 다재다능, 순전한 스타로서의 무게감 등 차트를 지배하는 모든 기술을 가진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힘”을 가진 그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세상을 치료하는 데에 몰두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전설이 된 그를 전 세계가 여전히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이유다.
“나는 의심 없이 나 자신을 믿고, 나의 혼을 작업에 불어 넣는다. 그러다가 죽어도 상관없다. 그게 나다.” 그의 혼이 담긴 음악은 그가 떠난 이 세상에서 여전히 사람들의 귓가를 맴돈다. “음악은 나의 발산 수단이며, 세계의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나의 선물이다. 내 음악은 영원히 남을 것이란걸 안다.” 그의 말이 사무친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음악은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