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첫 원정 8강을 목표로 했던 한국 축구대표팀이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조별라운드 4위로 16강 진출에 실패하며 조기 귀국했다.
외형적으로 대표팀이 거둔 성적은 1무 2패. 1998 프랑스월드컵 이후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에서 1승도 챙기지 못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쓴 것은 사실이지만 월드컵 무대에서의 1승을 거두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애초부터 8강은 절대 쉽지 않은 목표였음을 모르는 팬들도 거의 없다.
하지만 국내 축구팬들의 대표팀을 향한 실망감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이번 월드컵이 16강 일정을 종료하면서 축구팬들은 이미 패한 팀들을 수차례 접했다. 패장이지만 승리한 팀 감독 못지 않게 환호를 보낸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유독 홍명보 감독에게는 격려보다 실망 혹은 비판의 목소리가 더 높은 것이 사실이다.
이미 지난 일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물론 소용없는 일이다. 대한축구협회는 3일 홍명보 감독의 거취를 발표하겠다는 입장이다. 홍명보 감독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축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만한 위대한 현역생활을 했다. 올림픽대표팀을 이끌며 2012 런던올림픽 동메달을 획득해 지도자로서도 좋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다.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이끌었던 거스 히딩크 전 한국대표팀 감독 역시 지도자로서 좌절했던 경험이 있다. 프랑스월드컵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을 맡았던 그는 이후 레알 마드리드와 베티스 세비야에서 성적 부진으로 시즌 중 조기 경질 당했지만 이후 한국대표팀을 맡아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번 브라질월드컵에서 미국 대표팀을 16강에 올렸고 비록 8강에서 벨기에게 패했지만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 역시 2006년 독일대표팀 감독을 맡은 이후 2008-09 시즌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성적 부진을 이유로 경질돼 해당 시즌을 마치지 못했던 바 있다.
히딩크와 클린스만 외에도 명장으로 통하는 지도자들 중 축구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좌절을 경험하지 않은 지도자는 거의 없다. 홍명보 감독에게는 지금의 시련이 어떻게 보면 현역 생활과 지도자 생활을 통틀어 처음이자 가장 큰 시련일 수도 있다.
홍명보 감독을 지지하는 팬이든 비판하는 팬이든 홍명보라는 인물이 한국 축구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이 아니라도 그는 언제든 더 많은 경험을 쌓은 뒤 재차 대표팀 감독으로 자리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의 스승 중 한 명이자 세계적인 명장 히딩크 감독 역시 브라질월드컵이 끝나면 57세의 나이로 또 한 번 네덜란드 대표팀을 맡는다. 프랑스월드컵 이후 무려 16년만의 복귀다.
홍 감독은 대표팀 감독을 맡으면서 수많은 약속을 했다. "소속팀에서 뛰지 못하는 선수는 대표팀에서도 자리가 없을 것", "유럽에서 뛰는 선수라 특별 대우는 없을 것" 등과 같은 경기 혹은 경기력과 관계된 약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감독 취임 기자회견을 통해 홍 감독은 "준비 시간이 짧다는 것으로 핑계를 대진 않을 것이다. 오직 결과로 말하겠다. 성적이 좋지 않다면 물러날 것이다"라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그대로 끌고 갈 것인지 혹은 사퇴할 것인지에 대해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고민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홍명보 감독일 것이다. 그것조차 고민하지 않고 있다면 대표팀을 맡을 자격은 당연히 없다. 이미 홍 감독은 대표팀을 운영해 오면서 타인에 의해 억지로 약속했던 것들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스스로 거론하면서 약속했던 원칙들을 어겼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무기력한 탈락이었다. 그 많은 약속들 중 스스로 성적이 안 좋으면 물러나겠다는 약속까지 저버린다면 더 큰 비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지금 물러나는 것이 대표팀 감독으로서 혹은 축구 지도자로서의 은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적인 명장들의 예에서 보듯 시련 속에서 강해지는 지도자들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같은 뼈아픈 시련은 차후 좋은 지도자로 거듭나기 위한 배경이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지도자로서 더 큰 꿈을 꾸고 진심으로 세계적인 명장이 되길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스스로의 약속을 깔끔하게 이행하고 더 큰 미래를 보는 것이 옳은 선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