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선 중진 김무성 의원이 14일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새 당대표로 선출됐다. 이대로는 수권이 어렵다며 당 개혁을 전면에 내걸고서다.
그는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당시 창립멤버로 정치를 시작한 지 만 30년만에 집권여당의 수장 자리에 올랐다.
김무성 신임대표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까지 두번의 대선 고비고비마다 역할을 했지만 이른바 ‘친박(친박근혜) 주류’와는 노선을 달리한 인물이다. 스스로는 ‘원박(원조 친박)’을 자임한다.
김무성 신임대표는 1951년 부산에서 사업가이자 제5대 국회의원을 지낸 고(故) 해촌 김용주 선생의 3남으로 태어났다. 전남방직과 신한해운을 거느린 거부의 2세답게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골목대장을 도맡았다. 당시 별명이 ‘무대(무성대장)’라 불렸다고 하고, 현재까지도 그를 지칭하는 대표명이다.
지역 명문 경남중학교를 거쳐 중동고와 한양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26세에 동해제강 상무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중동고 재학 시절인 1969년 3선 개헌 반대를 위해 서울시내 12개 고등학교 대표들과 연합시위를 주도할 정도로 일찍 정치에 눈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84년 민추협을 결성하자 창립멤버로 참여했고, 1987년엔 통일민주당 창당발기인으로 정당 활동에 발을 담갔다.
이후 줄곧 김 전 대통령 계파인 ‘상도동계’로 활동하며 통일민주당과 민주자유당 총무국장, 의사국장, 의원국장 등을 두루 거치며 당료로서 실무를 익혔다.
이때 오랜 민주계 생활이 야권을 비롯해 정치권 전반에 걸친 넓은 인맥을 쌓는 정치적 밑거름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 집권 이후 민정비서관과 사정비서관 내무부 차관으로 활동했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부산 남구을에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 처음 금배지를 달았다. 박근혜 대통령과는 야당 대표 시절인 2005년 당시 국회 재정경제위원장이던 그가 사무총장으로 발탁되며 인연을 맺었다.
그는 국회직의 ‘꽃’으로 불리는 상임위원장 자리를 내놓고 야당 사무총장으로 묵묵히 살림을 꾸렸다. 2006년 대선후보 경선 캠프를 일찍 꾸리자며 원칙을 고수한 박 대통령과 의견차를 보였지만, 본선보다 치열한 2007년 ‘이명박 대 박근혜’ 대선 경선에서 실무를 총괄했다.
17대 대선 직후 이어진 2008년 18대 총선에선 ‘보복공천’의 대표격으로 낙천했지만, 지역구인 부산 남구을에 ‘친박 무소속’으로 출마해 4선에 성공했다.
당시 박 대통령이 “살아서 돌아오라”며 격려했고 이후 명실상부한 ‘친박좌장’의 타이틀을 달았다.
그러나 2009년부터 원내대표 자리를 맡는 것을 놓고 ‘야인’ 신분인 박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고, 세종시 이전안을 둘러싸고 확연한 이견차를 보이며 한 동안 갈라선 게 사실이다. 2012년 총선에서도 공천탈락의 수모를 겪었지만 이어진 대선 국면에서 막판 야당의 거센 공세가 이어지자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아 박 대통령 당선을 위해 말 그대로 ‘백의종군’했다.
지난해 부산 영도구 재선거에 출마, 5선 고지에 올랐다.
격의없고 선굵은 정치를 펼치지만 적절한 시점에는 여야를 아우르는 대화와 타협을 끌어 낸다는 평을 받고 있다.
부인 최양옥씨와 1남2녀. 2011년 큰 딸 혼사를 치르며 주변에도 알리지 않아 화제가 됐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부산(63) △중동고 △한양대 경영학과 △부경대 명예정치학 박사 △삼동산업 대표 △대통령 민정·사정비서관 △내무부 차관 △국회 재정경제위원장 △한나라당 사무총장·원내대표·비상대책위원장 △제18대 대선 새누리당 선대위 총괄본부장 △15·16·17·18·19대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