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밥심보다 술심 키우는 사회

입력 2014-10-06 15:21 수정 2014-10-0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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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교열기자

가을이 무르익은 들판은 황금물결이다. 이맘때 농부들은 바람에 일렁이는 실한 벼이삭을 보며 막걸리 한잔에 수확의 기쁨을 누렸다. 그런데 어느 해보다 풍년이 든 올해 황금 들녘에선 풍년가 대신 한숨소리가 넘쳐난다. 정부의 쌀 관세화를 앞두고 농민들이 분노에 차 있다. 정부의 대책 없는 쌀 관세화 통보는 한마디로 쌀에 대한 비관세 장벽을 완전히 허무는 것이다. 오늘날 농촌이 적자 영농에 힘겨워하고 우리 농산물이 저가 수입 농산물에 시장을 빼앗긴 것도 전면적 시장 개방에 따른 결과다. 수많은 농민들이 땅을 등졌고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은 세계 최하위로 고꾸라졌다. 정부가 마지막 남은 쌀마저 포기한다면 우리의 먹거리 현실은 그야말로 ‘참사’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인의 삶은 쌀을 떠나 생각하기 어렵다. 밥심으로 살아온 우리에게 쌀은 먹거리 그 이상이다. 지인을 만났을 때 건네는 인사말 “식사하셨습니까”에는 밥심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다. “밥숟가락을 놓았다”는 죽었다는 의미요, “밥술 꽤나 뜬다”는 부자를 뜻한다. 시인 김지하는 “밥은 하늘이다”며 “한국인은 밥에서 이상향을 찾는다”고 말했을 정도다. “농업은 생명창고”라고 강조한 윤봉길 의사는 ‘농민독본’에서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은 결단코 묵은 문자가 아니다. 이것은 억만년이 가고 또 가도 변할 수 없는 대진리다”고 말한 바 있다. 백번 지당한 말씀이다.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한다 해도 ‘농심은 천심’이라는 말은 결코 ‘묵은 문자’가 아니다. 따라서 정부는 쌀 개방 정책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밥심’은 ‘밥을 먹고 나서 생긴 힘’으로 ‘밥+힘’의 형태를 갖는다. ‘밥힘’에서 ‘ㅎ’이 뒤에 이어지는 모음 ‘ㅣ’의 영향을 받아 ‘ㅅ’으로 바뀐 ‘ㅎ 구개음화 현상’으로 ‘밥심’만이 표준어다. 즉 ‘밥힘’은 존재하지 않는 단어로 사용해선 안 된다. 남이 뒤에서 도와주는 힘 혹은 어떤 일을 끝까지 견디어 내거나 끌고 나가는 힘을 의미하는 ‘뒷심’도 ‘뒤+힘’에서 온 말이다. 그런데 [뒤ː씸/뒫ː씸]으로 발음돼 사이시옷 규정에 따라 ‘뒷심’이 표준어로 정해진 것이다. 뱃심(염치나 두려움이 없이 제 고집대로 버티는 힘), 알심(보기보다 야무진 힘) 등의 ‘심’ 역시 ‘힘(力)’의 구개음화 형태다.

배부르고 등 따뜻한 게 최고의 행복이던 때가 있었다. 뱃속만 든든해도 행복하다고 믿었던 가난하던 시절 이야기다. 어릴 적 우리집 아랫목 담요 밑에는 늘 따뜻한 쌀밥이 놋그릇 속에 가득 담겨 있었다. 퇴근 후 술이 얼큰하게 취해 돌아오실 아버지를 위하는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었다. 그 귀하던 밥이 어느 순간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쌀이 남아돌고 있다. 세상 시름에 지친 이들은 이젠 밥심이 아닌 술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그런데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먹거리가 다양해도 인류의 삶의 터전은 농촌이고 농업이라는 건 절대 변하지 않을 진리다. 정부의 현명한 판단으로 농부들이 하루빨리 웃음을 되찾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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