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는 이제 대세다. K-팝을 넘어 영화나 뮤지컬까지 엔터테인먼트 전반으로 영역을 넓히며 한류는 전 세계 시장을 사로잡고 있다. 물론 스포트라이트는 몇몇 스타의 몫이다. 하지만 현장 속에서 숨가쁘게 뛰는 수많은 종사자들과 미래를 꿈꾸는 지망생들이 있기에 한류로 대표되는 한국의 문화산업은 생명력이 있다. 그래서 이투데이 기자들이 나섰다. 문화산업 현장의 곳곳에 잠시 펜을 내려놓고 맨몸으로 뛰어들었다. 직접 보고, 듣고, 느꼈던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전달한다.
“얼마나 간절하게 노력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꿈을 향한 첫 걸음이 되길 바랍니다.” 벌써 다섯 시즌째 ‘K팝스타’를 연출하고 기획한 박성훈 PD는 오디션 참가자들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이른 아침, 본격적인 오디션이 시작되기 전 단상에 오른 박 PD는 참가자만큼이나 긴장된 모습으로 당부의 말을 남겼다.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먼저 보여주세요.”
지난달 19일 오전 8시, 경기 일산 킨텍스 제2전시장은 K-팝 스타를 꿈꾸는 수천여명의 참가자들이 끝없이 줄지어 있었다. 본선을 앞두고 진행된 마지막 예선이었던 만큼 가장 많은 참가자가 모였다. 5살 꼬마 아이부터 40대 아저씨까지 연령대도 다양했고, 교복을 입은 학생부터 군복 차림의 군인까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출연자들이 새로운 스타 탄생을 꿈꾸고 있었다.
‘K팝스타’는 오디션 열풍이 한창이던 지난 2012년 첫 방송을 시작해 올해로 다섯 번째 시즌을 맞았다. K-팝 인기를 이끈 YG엔터테인먼트 양현석, JYP엔터테인먼트 박진영 등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오디션 프로그램 후발주자였음에도 경쟁력을 높였다. 박 PD는 “오디션 열풍이 한풀 꺾였다고 하지만 역대 가장 많은 참가자가 지원했어요. 감사하면서도 책임감을 느낍니다”라고 말했다.
◇6시간 넘는 대기시간… 오디션 마치자 “망했어요” = 오디션 현장은 참가자들의 노랫소리로 가득했다. 벽을 보고 음색을 가다듬는가 하면 이어폰을 끼고 기타를 치며 자신만의 음악세계에 몰두했다. 대기실 뒤편에 마련된 거울 앞에선 10대 여성 참가자들이 걸그룹 못지않은 현란한 춤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현장 분위기는 고조됐고, 긴장감이 엄습했다. “아~ 아~” 애꿎은 목을 풀어봤다. “너무나 오래 참았어. 가슴만 설레 눈감고” 준비한 노래를 큰 소리로 불러봤다. 기자는 P부스 70번을 배정받았다. 순서는 선착순으로 정해지는데 아침 일찍 나갔음에도 순서가 한참 뒤로 밀렸다.
아무 것도 먹지 않았지만 긴장감에 배는 고프지 않았다. 심호흡을 하려고 대기장 밖으로 나갔다. 넓은 광장도 연습에 한창인 참가자들로 인산인해. 한쪽 벤치에서 땀을 흘리며 지인과 통화 중인 참가자 A씨가 보였다. 대화 곳곳에 아쉬움이 가득 묻어났다. 이미 오디션을 마치고 나온 그였다.
“오디션 잘 보셨어요?” 말을 걸었다. “망했어요. 정말 아쉬워요”라며 그가 고개를 푹 숙인다. 그러나 이내 “근데 기대가 좀 되는 것도 사실이에요. 앞선 참가자들은 금방 끝났는데 저는 몇 곡 더 불러보라고 했거든요”라고 말하며 기대 반 실망 반의 표정을 짓는다.
“P 50, T 30.” 마이크를 통해 순서가 호명된다. 부스별로 진행 상황이 달라 자신의 번호를 예의주시해야 했다. 6~7시간에 달하는 오랜 대기 시간은 옆에 있는 생면부지의 사람과 친분을 쌓기에 충분했다. 어떻게 보면 동변상련의 마음일 것이다.
“영어교육과 나온 사람은 저밖에 없을 걸요”, “우리 딸이 가수가 되고 싶다고 해서 같이 왔어요”, “저 합격하면 어떡해요? 부대에 말 안했는데…”, “오늘을 위해 5년을 준비했습니다. 혼자서요.” 사연도 참 가지각색이다.
◇60초에 결정되는 인생의 향방= 오디션 부스는 A부터 V까지 총 22개로 마련됐다. 각 부스마다 200~300명이 자신의 실력을 뽐낸다. 각 참가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불과 60초. 심사위원 재량에 따라 더 많은 시간을 부여받을 수 있지만 하루 수천 명의 참가자를 심사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리 많은 시간이 있을 리가 없다.
“자기 소개를 간단히 한 후 노래를 시작하면 됩니다.” 부스 앞에 줄을 서고 오디션 매뉴얼을 전달받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가사를 까먹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노래를 되뇌었다. 앞선 참가자들은 발라드, 랩 등 준비해온 노래를 마음껏 뽐냈다. 음원을 직접 준비해 춤을 추는 참가자도 있었다. 부스에 가려 있었지만 노랫소리는 대회장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다음 참가자 들어오세요!” 드디어 기자의 차례다. 부스 안으로 들어가자 두 명의 심사위원이 반갑게(?) 맞아줬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에 고개를 숙이며 큰 목소리로 이름과 나이를 밝혔다. 숨 고를 틈도 없이 노래가 시작됐다. 무반주에 마이크도 없다. 최대한 리듬을 타며 열창했다. 시선은 정면 카메라에 고정됐지만 기자를 바라보는 심사위원의 날카로운 눈빛이 느껴졌다.
노래가 끝나자 “팝송 부르는 분위기를 보고 싶어요”라며 생각지도 못한 돌발 요청이 들어왔다. 평소 즐겨 부르는 팝송은 있었지만, 갑작스런 주문에 영어 울렁증이 밀려왔다. 기자가 머뭇거리자 심사위원은 다른 가요의 후렴구를 주문했다. 심호흡 후 정준영의 ‘응급실’을 불렀다. 처음과 달리 반응이 그리 좋지 않은 것 같다. 아쉬움이 밀물같이 밀려왔다.
하지만, 오디션이 끝나자 왠지 모를 뿌듯함도 느껴졌다. “이 작은 부스에서 K-팝 스타가 탄생했구나.”
내 노래가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작은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졌다. 당락에 상관없이 그 순간만큼은 내가 주인공이었다. 짧은 심사였지만 오디션 참가자들의 열정과 꿈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직업이 재밌네요? 결과가 좋아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면 어떤 결정을 내릴 거죠?” 심사위원의 질문이 기억났다.
취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인가. 말도 안되는 치기어린 망상이지만, 오디션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이 질문을 수십번 떠올리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