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베일에 싸여 있었던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4층이 공개됐다. 이곳은 롯데그룹의 창업주 신격호 총괄회장이 머무는 침실과 집무실이 있는 곳이다. 신 총괄회장의 개인 공간을 제외하면, 텅 비어 있는 곳으로 그야말로 ‘신격호의 비밀의 공간’이다. 롯데그룹이 경영권 분쟁에 휩싸이면서 신 총괄회장이 머물고 있는 이곳이 유독 주목을 받고 있다. 경영권 분쟁의 시발점이자 변곡점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롯데홀딩스에서 해임된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이 4월 부인과 함께 10여일간에 걸쳐 아버지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에게 읍소해 결국 마음을 돌리게 한 곳이 바로 34층이었다.
지난 7월 중순께 신격호 총괄회장이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직위해제 지시서에 서명한 곳도, 신동빈 회장과 이사진을 직접 해임하기 위한 아버지의 일본행을 강행하려던 신영자 이사장과 신동주 전 부회장이 7월 27일 오전 경호원과 승강이를 벌인 곳도, 차남의 반격으로 왕좌에서 강제로 끌어내려진 신격호 총괄회장 일행이 돌아온 곳도, 그리고 직접 롯데그룹의 후계자는 장남이라고 밝힌 곳도 모두 롯데호텔 34층이다.
이곳은 아버지의 관리 권한을 놓고 벌이는 두 형제간의 웃지 못할 신경전이 펼쳐지는 ‘롯데가문 막장드라마’의 연출 장소로 전락해버렸다. 롯데호텔 34층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베일벗은 롯데호텔 34층에선 무슨 일이= 롯데호텔 34층은 엘리베이터도 서지 않고, 비상계단도 막혀 있다. 철저히 허락된 사람들만 드나들 수 있는 통제된 곳이다. 특수 키를 가진 사람만 34층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
철저히 출입이 통제됐던 이 곳의 문이 지난 16일 열렸다. 두 아들의 경영권 분쟁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당시에도 침묵했던 신 총괄 회장이 언론에 직접 자신의 칩거 장소를 공개하며, 입장을 밝혔다.
16일 하루동안 롯데호텔 34층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곳의 관리 권한을 놓고 동주·동빈 형제의 충돌이 일어날 것이란 소식에 롯데호텔 1층에는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기대치도 않았던, 34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취재진은 일제히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신 전 부회장이 한국에 기반을 닦기 위해 설립한 SDJ코퍼리에션 측은 애초 1층에서 관리권한에 대해 입장을 밝힐 계획이었다. 그러나 신 전 부회장이 언론에 직접 입장을 밝히겠다는 신 총괄회장의 뜻에 따라 이 곳의 출입을 허가했다.
결국 철저히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며, 이 곳에 줄곧 머물러왔던 신 총괄회장 본인의 자청으로 비밀의 문이 열린 셈이다.
이날 신 총괄회장은 장남의 롯데그룹 경영을 지지한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신 총괄회장은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에 대한 위임장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고 어떤 영향이 있는지 알고 서명했느냐”는 질문에 “후계자는 장남이다”고 말했다. 아울러 건강 상태를 묻자 “좋다”고 답했다.
그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크게 말해줘야 알아들었지만 신 전 부회장의 경영을 지지한다는 의사 표현만큼은 명확히했다.
다만, 아직 10년, 20년 더 일을 할 생각이며, 재차 묻거나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해 판단력 논란에서는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롯데그룹 측은 신 총괄회장의 발언에 대해 “신동주 전 부회장의 주도로 일시적이고 단기적인 상황에서 이뤄진 것으로 본다”며 “조만간 신 총괄회장의 의중을 들을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날 인터뷰에는 신동주 전 부회장, 신격호 총괄회장의 동생 신선호 일본 산사스 사장, 민유성 전 산은금융지주 회장 겸 산업은행장, 신동주 부인 조은주씨가 배석했다.
◇비밀의 문은 어떻게 열렸나?= 비밀의 문이 열리기까지 16일 하루동안 신동주·동빈 형제의 신경전은 막장드라마와 다름 없었다. 먼저 공격을 시작한 것은 신 전 부회장 측. 신 전 부회장이 한국에서 기반을 닦기위해 한국에 설립한 SDJ코퍼레이션은 이날 오후 12시경 “신격호 총괄회장이 신동빈 회장에게 자신의 롯데호텔 무실 주변에 배치한 직원을 해산하고 CCTV를 철거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친필 서명이 담긴 통고서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통고서에 적힌 신 총괄회장의 6가지 요구사안은 △본인의 복귀와 명예회복에 필요한 조치를 할 것 △신 회장을 포함해 경영권 탈취에 가담한 임원의 전원 해임 및 법률상 책임 추궁 △총괄회장의 집무실 주변에 배치한 직원 해산 및 CCTV 철거 등이다.
SDJ코퍼레이션 측은 친절하게도 이 같은 사실을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알렸고, 롯데 본사 방문 계획도 전했다.
이어 오후 1시 정혜원 SDJ코퍼레이션 상무는 서울 소공동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 집무실을 방문해 신격호 총괄회장의 통고서를 직접 전달하러 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롯데그룹 관계자들과 신경전을 벌였다. 낯 뜨거운 설전이였다. 신 전 부회장 측은 “내용증명을 수령해라”고 소리 질렀고, 신 회장 측은 “주거침입으로 경찰을 부르겠다”고 말했다.
롯데 측은 서류를 우편으로 발송해달라고 요청했지만 SDJ 측은 주말이 껴서 내용 효력 발생을 앞당기기 위한 것으로 우편 송달만 고집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결국 SDJ측은 신 회장을 만나지 못한 채 법률 대리인에게 서류를 전달했다.
이에 정혜원 상무는 “신동빈 회장 측에서 통지서 수령을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SDJ코퍼레이션 측은 내용용증명 내용에 따라 신격호 총괄회장 집무실 관리를 위한 인수인계를 오후 4시에 진행하기 위해 신 총괄회장 집무실이 있는 롯데호텔로 향했다.
그리고 오후 4시경 신동주 전 부회장, 정혜원 SDJ상무 등이 롯데호텔 신격호 총괄회장 집무실을 전격 방문해 인수인계를 시도했다. 이 와중에 롯데 측 경호원과 또다시 마찰을 빚었다. 무력 충돌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고성이 오가며 일촉즉발의 상황을 연출했다. 이 자리에는 신동주 전 부회장의 편으로 알려진 신선호 일본 산사스 회장도 함께했다.
이 같은 승강이가 있고 난 후, 롯데호텔의 문이 열렸다.
다만, 이날 신 부회장이 공개한 신격호 회장 친필 서명으로 작성된 ‘통고서’는 이미 내용증명 형식의 우편으로 롯데그룹에 발송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내용증명은 다음 주 중 도착할 예정이다. 결국 굳이 이날 직접 통고서를 들고 롯데그룹 본사를 찾아 ‘수령’을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한 관계자는 ‘언론플레이’와 다름 없는 연출이라고 지적했다.
◇신격호의 비밀공간→ ‘반 신동빈 아지트’로 전락→ 두형제 공동관리= 두 아들의 신경전이 극에 치닫는 롯데호텔 34층. 신 총괄회장의 호텔롯데 34층 집무실 관할 다툼은 신 전 부회장으로선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분석이 많다. 신 전 부회장이 경영권 분쟁의 명분을 전적으로 부친 신격호 총괄회장에 기대고 있는 만큼 신 총괄회장에 대한 접근권을 제한하려는 동생 신 회장의 전략에 맞설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롯데가 경영권 다툼이 시작되면서 신 회장과 나머지 롯데 일족들의 갈등 양상으로 번지자 롯데호텔은 ‘반(反) 신동빈 동맹’의 아지트화가 되어갔다.
신 총괄회장은 다툼의 시작을 알렸던 신 회장 및 측근 이사 해임안을 지시한 롯데홀딩스 주주총회가 끝난 후 일본에서 귀국한 뒤로, 줄곧 롯데호텔 34층에 머물면서 장남 신동주 전 일본롯데 부회장과 장녀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측 인사들과 접촉해 왔다.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의 집무실은 롯데호텔 17층에 있고, 신 이사장의 장녀 장선윤 호텔롯데 상무의 사무실은 23층에 있다.
신 전 부회장 역시 서울 성북동과 경기도 일산에 자택이 있지만, 한국에 머물때 줄곧 롯데호텔을 오고갔다.
지난 8월에는 신 총괄회장을 24년간 보필해 온 김성회 비서실장이 사임하고, 그 자리에 신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해 온 이일민 전무가 앉게 됨에 따라, ‘반신동빈 아지트’로 전락했던 롯데호텔 34층을 사실상 신 회장이 장악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다.
이후 신 전 부회장측은 롯데그룹이 신 총괄회장 집무실을 일방적으로 통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롯데는 “신격호 총괄회장의 집무실과 비서실은 장악되거나 불법 업무보고 요구용 대상이 아니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어 롯데는 “고령인 신 총괄회장의 신변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확인되지 않은 제 3자의 출입을 통제했을 뿐 거처 출입을 제한하거나 가족들의 방문을 통제한 적이 없다”며 “거처에 설치된 CCTV는 이미 수년 전에 신 총괄회장 지시에 따라 설치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신 전 부회장이 지난 16일 신 회장에게 신 총괄회장 집무실을 본인이 관리하겠다고 통보한 뒤 비서진 등 인력을 배치함에 따라 현재 롯데호텔 34층은 두 형제가 공동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