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에게 사도세자가 있었다면 인조에게는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있었다. 둘 다 아들이 죽은 건 같은데, 사도세자를 죽게 한 영조와 달리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한 인조의 ‘작용’은 확실하지 않다. 1612년 2월 5일(음력 1월 4일) 태어난 소현세자는 14세 때 세자로 책봉됐다. 병자호란 후인 1637년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8년 만에 귀국했지만 불과 두 달 만인 1645년 5월 21일(음력 4월 26일) 33세로 급서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 죽었다고 돼 있으나 염습(斂襲)에 참여했던 이가 “시신이 온통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에서 피를 흘리고 있어 약물에 중독된 것 같았다”는 증언을 남겼다는 기록이 있다. 인조는 그 뒤 세손을 제쳐두고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삼았고, 임금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고 소현세자의 아내 강빈도 죽였다. 손자 셋은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12세, 8세였던 장남과 차남은 이듬해 죽고, 막내는 10여 년 후 효종 때에야 풀려났다.
이런 일로 미루어 소현세자의 죽음에 인조가 관련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삼전도의 굴욕’ 콤플렉스가 심했던 인조가 어느 새 왕위를 위협하는 인물로 성장한 아들을 제거했다는 시각이다.
소현세자는 인질생활을 하는 동안 조선인 포로 속환을 비롯한 현안을 처리하는 등 조선과 청나라 간의 외교 창구 역할을 했다. 또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을 모아 농사를 짓고 그 곡식으로 무역을 했다. 인조는 이것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소현세자는 예수회 선교사인 천문학자 아담 샬과 교류하며 천구의와 천주상 등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그에게 보낸 편지에는 서학(西學) 보급에 강한 의지가 드러난다. 그가 왕이 됐더라면 조선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쉽고 분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