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최초’라는 책임

입력 2016-11-10 11:01 수정 2016-11-1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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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경 기획취재팀장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는 옛말이 있듯 ‘처음’,‘최초’ 등과 같은 수식이 붙는 자리에 앉는 사람은 막중한 책임을 갖게 된다.

공적인 자리라면 남성에게보다는 여성에게 더 많이 붙는 수식일 것이다.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할 뻔했지만 제45대까지 와서도 어려운 수식어가 됐다.

한국이 이건 미국보다 빨랐다. 대통령 선거에 본격적으로 나오기 한참 전인 지난 2002년, 당시 한겨레 기자 출신으로 잡지 ‘프리미어’ 편집장이던 최보은 씨가 월간 ‘말’과의 인터뷰에서 “만약 박근혜 의원이 출마하면 나는 그를 찍겠다”고 선언해 화제가 됐던 걸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진보 진영의 공격을 받자 최 씨는 ‘정치인 박근혜’를 지지한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정치판에서의 여성 참여가 너무나 뒤떨어져 있어 상징적으로 했던 말이라고 설명했더랬다.

박근혜 의원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갔다가 밀렸지만, 2012년 새누리당 후보로 당선됐고, 결국 여성 최초로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를 지지했건 지지하지 않았건 간에 ‘여성 대통령’의 탄생은 크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일은 아니었다. 문을 열었다는 의미가 있으니까.

물론 ‘최초’라는 자리는 부담이 크다. 정치관이나 스타일, 성격과 외모가 각기 다른 남성들만 있었지 여성은 없었기 때문에 일을 잘 못하면 “저 사람이 여성이라 그렇다”는 천편일률적이고 공정치 못한 뒷말을 듣기가 쉽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최초로 부녀가 대통령직을 맡았다는 특수성까지 있다. 누군가 얼마 전 트위터에 이런 트위트를 올린 걸 봤다. “박근혜 대통령이 잘할 땐(?) 박정희를 입고, 못할 땐 ‘여자’를 입는다. 박근혜 개인의 입장에서도,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도 굉장히 불행한 일이다”라고.

“여성이라서 여성을 지지한다”는 건 흑묘백묘(黑猫白猫)론도 아니고 꽤 유치한 말이다. 그러나 여성들의 공통적인 바람은 있다. 아마 이게 아닐까. “(일) 잘하는 여성이 있다면 여성이기에 더 지지하겠다”라는.

미국 대선 과정에서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만들기 위한 억지스러운 일들이 있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지지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지옥에 자리를 마련해 두겠다”란 폭언(?)도 서슴지 않았다.

‘최초’로서 귀감이 됐던 여성 중 한 명이 최근 유명을 달리했다. 재닛 리노 전 미국 법무장관.

리노 전 장관은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의 제1의 카드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리에 오른 이후엔 어려운 사건들을 잘 헤쳐나갔다. 텍사스 주 웨이코에서의 사교집단 ‘다윗파’ 강제 진압에 이어 1994년에는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의 ‘화이트워터’ 부동산 사기 사건을 다뤘고, 2000년엔 쿠바에서 탈출했다 홀로 살아남은 6세 엘리안 곤잘레스를 쿠바에 있던 아버지에게 돌려보내는 특공작전을 결정하기도 했다. 그는 일에선 강인함을, 사적으로는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미국 공영방송(NPR)은 회고했다.

긴장 관계를 유지한 클린턴 전 대통령이 한 방송에 출연해서 자신에 대해 “좋은 여성”이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최소한 나쁜 사람이라 하지 않았다”며 반길 만큼 강단이 있었다. 임기 마지막 날에는 자신을 흉내내기로 유명했던 코미디언 윌 페럴이 진행하는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에 출연했다. “우울할 땐 어떻게 하느냐”는 페럴의 질문에 “춤을 추지요”라며 진짜 춤을 췄다.

일해재단 사태 때처럼 퇴임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단지 불찰로 측근에게 경계의 담장을 낮췄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최초’도 모든 의혹에 대해 꼭 투명하게 설명하고 책임질 부분은 책임져야 한다. ‘최초’에게 아름다운 퇴장이 없다면 앞으로 오랫동안 우리는 여성 대통령을 다시 만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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