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2월 알렉산드라는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 1869년 함경북도 경흥(경원)의 대홍수를 피해 부친 김두서가 노령(露領)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189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친구인 스탄케비치에게 맡겨졌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여학교에서 사회주의를 공부하며 붙임성 있고 쾌활한 여성으로 잘 자랐다. 16세에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남편이 방탕한 생활을 하여 결국 이혼했다.
재혼하여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나, 1914년 가족을 떠나 조선인, 중국인 노동자를 대규모로 고용하는 우랄 지방 벌목장의 통역관이 되어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1917년 2월 혁명 때 차르 정부가 지불하지 않은 노동자의 임금을 대신 받아주었다. 그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소송대리인이 되어 소송을 승리로 이끌었고, 뤄쯔거우(나자구·羅子溝) 무관학교 생도 출신인 이들 조선인 노동자들과 ‘우랄노동자동맹’을 조직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레닌이 지도하는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뒤 7월 당 사업을 위해 극동 지방으로 파견되어 선전, 선동 사업을 전개하면서 활동하였다.
1917년 10월 ‘자랑스러운 조선 인민의 딸’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지방대표자대회에 대표로 참가하였으며, 1918년 1월 하바롭스크 시 당서기가 되었다. 당과 소비에트 사업에 참여, 볼세비키 조직의 핵심 인물로 극동인민위원회 외무위원도 맡아 하바롭스크의 영웅이 되었다. 4월에는 이동휘와 함께 ‘반일반제(反日反帝)의 사회주의 노선’을 강령으로 채택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산주의 조직인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산하 출판사인 보문사에 자금을 지원하며, 한인 사회의 등불과 같은 기관지 ‘종’을 발간하는 등 교육, 조직, 선전 활동을 계속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인들을 모집, ‘한인사회당 적위군’을 조직하여 일본군 및 백위군과 전투를 하게 하는 한편, 일본군이 연해주에 출병했을 때 반제반전(反帝反戰) 사업을 전개하기 위해 ‘일본군 병사들에게 고하는 호소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6월 말에 100명으로 조직된 조선인 적위대에 참가하여 투쟁을 계속하다, 1918년 9월 하바롭스크가 일본군과 백위군에 함락되었을 때 백군에 체포되었다.
34세에 “나는 조선 인민이 러시아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달성하는 경우에만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이루게 하소서. 나는 온 세상 노동자의 자유를 위해 이렇게 죽어갑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9월 16일 새벽 4시 총살당했다.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