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 특별검사팀의 ‘날카로운 창’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단단한 방패’를 뚫지 못했다. ‘430억 원 뇌물 공여’ 등의 혐의를 놓고 맞붙은 명운을 건 법리공방에서 법원이 이 부회장의 손을 들자, 삼성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했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이 부회장 구속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 직접 수사로 직결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특검은 향후 수사 계획과 전략에 큰 차질을 빚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조의연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19일 뇌물공여,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국회증언감정법 위반 혐의로 청구된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이 부회장의 혐의가 범죄 구성 요건을 충족하는 것으로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법원의 판단이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구속 위기를 넘긴 이 부회장은 밤샘 대기하던 서울구치소를 떠나 곧바로 삼성 서초사옥으로 향했다. 그는 밤새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며 대기하던 최지성 부회장(미래전략실장) 등 그룹 수뇌부와 함게 향후 대응책 논의를 이어갔다.
삼성은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1938년 창사 이래 처음으로 오너가 구속되는 최악의 사태는 면했다는 분위기다. 그러나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사건이 한국 사회는 물론, 해외에서도 큰 이슈로 떠오른 만큼, 삼성은 사태가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신중함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 부회장이 ‘귀가’ 대신 ‘귀사’를 선택한 것 역시 이 같은 신중함 때문이다.
삼성은 이번 사태로 반세기 이상 공들여 쌓아올린 브랜드 인지도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우려하고 있다. ‘청문회 증인-특검 소환조사-구속영장 청구-피의자 심문’ 과정에서 훼손된 그룹 이미지와 자존심을 만회해야 한다는 것. 삼성은 전략팀, 인사지원팀, 법무팀, 기획팀, 커뮤니케이션팀(홍보) 등을 아우른 미래전략실 인력을 총동원해 재판 과정에서 ‘무죄 입증’을 적극 피력하는 데 총력을 다할 계획이다.
70여 일간의 특검 수사 기간 가운데 첫 고비를 맞은 특검 역시 전략 수정에 돌입했다. 특검은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 기각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과 대기업의 뇌물 의혹 수사는 중단 없이 계속할 방침이다. 특검은 삼성 수사를 마무리짓고 SK, 롯데, CJ 등 다른 대기업으로 수사를 확대할 예정이었지만, 삼성의 뇌물죄 성립이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음에 따라 다른 기업에 대한 수사 역시 방향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이달 말에서 다음 달 초로 예상되는 특검의 박 대통령 대면조사 계획도 조사 내용이나 수사 방침이 대폭 수정될 전망이다.
조 부장판사는 이날 가장 큰 쟁점이었던 뇌물 혐의에 관해 “현재까지 이뤄진 수사 내용과 진행 경과 등에 비춰볼 때 현 단계에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함께 영장에 기재된 횡령이나 위증 혐의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