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1세의 뒤를 이어 국왕에 오른 찰스 1세(1600.11.19~1649.1.30)도 아버지처럼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였다. 그는 왕의 통치권은 신이 부여한 불가침의 절대 권위라고 확신했다. 자연히 왕권을 견제하는 의회와 항상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영국 의회에는 젠트리라 부르는 신흥 상공업자와 자영농들이 대거 진출해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청교도였다.
즉위 초반 찰스 1세는 전쟁 비용 문제로 의회와 대립한다. 스페인, 네덜란드 등과의 전쟁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자 찰스 1세는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거둔다. 의회, 특히 청도교 의원들이 거세게 반발했고, 찰스 1세는 그들을 체포한다.
이에 의회는 1628년 의회 동의 없이 어떤 세금도 거두지 못하게 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권리 청원’을 제출한다. 찰스 1세는 이를 수용한다고 했지만 몇 개월 후 의회를 해산하고, 11년간 한 차례도 의회를 열지 않았다. 그럴수록 의회의 울분은 점점 쌓여갔다. 이들의 갈등은 결국 종교 문제에서 폭발한다.
찰스 1세는 국교회 신봉자였다. 그의 종교적 포부는 국교회로 하나 된 영국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장로교의 뿌리가 깊은 스코틀랜드에 국교회를 믿으라고 강요한다. 이에 스코틀랜드는 무장 봉기를 일으켰고, 전비 마련을 위해 찰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의회를 소집한다. 그러나 11년 동안 의회를 열지 않고 독단적으로 정치를 하는 왕에 대해 불만이 높은 의회가 순순히 따를 리 없었다.
결국 왕을 지지하는 왕당파와 왕을 비판하는 의회파 사이에 내분이 격화되었고, 1642년 전쟁이 발발한다. 이른바 청교도 혁명이었다. 처음엔 왕당파가 유리했지만 올리버 크롬웰이라는 의외의 복병이 나타나 전세를 뒤집으며 의회파의 승리로 끝난다. 찰스 1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김대환 편집위원 daehoan3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