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택왕후는 백제 30대 왕 무왕(재위 600∼641년)의 왕후이고, 백제 귀족인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다. 사택왕후는 2009년 1월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보수, 정비할 때 세상에 나타났다. 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미륵사’라는 절의 창건 주체·시기·내력을 증언하는 유물인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가 발굴되었다.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굴되기 전까지는 신라의 선화공주가 백제 무왕의 왕비이고, 미륵사를 창건하는 데 기여했다고 알려져왔다.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와 백제 서동의 혼인 일화는 ‘서동요’라는 향가로 기록되어 지금까지도 전해져 왔던 것이다. 그런데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굴되면서 무왕의 비이자 미륵사 창건에 기여한 인물이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왕후였음이 밝혀졌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삼라만상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639)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금제사리봉안기’에서는 미륵사가 창건된 시기가 기해년, 즉 639년이라고 하였다. 639년은 백제 무왕이 즉위한 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사택왕후는 사택씨 출신이다. ‘수서(隋書)’ 백제전에는 백제 후기의 유력한 귀족가문으로 대성팔족(大姓八族)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택씨(沙宅氏)는 그중에서도 첫 번째로 언급된다. 사택씨는 현재 부여 지역인 나지성(奈祗城)을 세력기반으로 하는 가문으로, 사씨(沙氏)라고도 한다. 사택씨는 백제 성왕이 538년에 사비(부여)로 왕경을 옮기면서 그 세력이 더욱 공고해졌다.
사택왕후는 백제 후기의 유력 가문이었던 사택 집안의 딸이었다. 사료에 의하면 무왕은 어릴 때는 가난하여 마를 팔아 생계를 꾸리는 아이라 하여 ‘서동’이라 불릴 정도로 한미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출신의 한계는 왕으로 즉위한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백제의 왕도인 부여를 기반으로 한 유력 가문인 사택씨의 후원은 무왕의 왕권에 가장 큰 지지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택씨의 후원은 정치적 지지뿐만 아니라 재정적 지원까지도 겸한 것이었으리라 여겨진다. 사택왕후의 미륵사 창건은 무왕에 대한 사택씨의 재정적 후원과 정치적 지지 모두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