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를 살았던 여인들은 유람이 쉽지 않았다. 이런 한계 속에서도 현명하고 여유가 있었던 여인들은 마당으로 작은 산수를 들여왔다. 인위적으로 단장된 일본식 뜰과 달리 조선의 뜰이 자연 그대로인 이유다. 저자가 의도한 것은 사임당이 보고 느꼈을 법한 뜰을 소개하는 일이다. 이 책에는 사임당의 큰딸로 어머니의 재능을 듬뿍 물려받은 매창의 그림도 몇 편 소개되어 있다.
각각의 그림을 보고 바로 뒷장에 있는 저자의 설명을 읽어나가는 방법도 좋지만, 이 책은 또 다른 유용성이 있다. 저자가 율곡, 사임당 그리고 매창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듯 꾸민 글이 뒷부분에 나오는데,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그 속에서 아들과 딸과 어머니가 경험했을 법한 제각각의 상황을 잘 그려냈다. 신사임당은 영특한 셋째 아들 이이 덕분에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살았지만, 말하지 못할 아픔도 있었다.
당시는 벼슬에 오르지 않으면 별다른 출세의 길이 없던 시절이었다. 다른 사대부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신사임당 역시 남편이 과거에 급제해 희미해진 덕수 이 씨 집안을 크게 일으켜줄 것을 기대하였다. 과거시험에 매달린 남편을 대신해 신사임당이 살림을 전적으로 도맡았던 이야기이다. 남편이 벼슬길로 나선 것은 남편이 오십 세가 되던 해였다. 그 바로 이듬해에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면서 남편은 환갑이 지나 이세상을 떠날 때까지 관직에 머물면서 일곱 남매를 돌봤다고 한다.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사임당의 ‘묵포도’가 나온다. 오만 원권 지폐에 사임당의 초상과 함께 들어간 포도 그림이다. 색을 쓰지 않고 먹으로만 그린 포도인데, 먹으로 그렸다고 해서 묵포도라 부른다. 그림에 조예가 깊지 않은 이일지라도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사임당의 묵포도는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 실제 포도보다 더 매끈하다. 아마도 사임당의 마음이 이렇게 정갈하지 않았을까.”
사임당은 다른 아내, 다른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남편과 아이들의 출세를 바랐을 것이다. 이런 마음은 그가 그린 쏘가리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치 금방이라도 살아날 것처럼 보이는 쏘가리 그림은 옛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급제하여 궁궐에 들어가는 것을 뜻하였던 것이다. 달개비와 추규를 그린 ‘계거추규’라는 그림의 하단에는 말똥구리 두 마리가 힘을 합하여 말똥을 굴리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는 벌과 나비, 잠자리 등 지금도 흔한 곤충들을 볼 수 있는데, 뜰에서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지켜본 사임당을 상상케 한다.
머리가 복잡할 때 보는 화보집은 그 어떤 것보다도 청량감을 선사한다. 우리와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달음박질하듯이 달려야 하는 시간 속에서도 쉬엄쉬엄 속도를 늦춰야 할 때 읽을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