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을 바라보는 한 선배가 며칠 전 이런 내용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해변 길은 사람이 혼자 걸어가도 쓸쓸해 보이는데, 포메라니안 종(種)이라는 이 개도 그랬던 모양이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흐린 날이었으려나, 아니면 바다 저쪽 노을 붉은 저물녘이었으려나? 누추한 모습으로 한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가는 개를 보며 선배가 느꼈을 쓸쓸함과 애잔함이 전해왔다. ‘누가 왜 언제 버렸을까’로 시작된 생각이 ‘애인에게서 개를 선물받았던 여인이 애인에게서 버림받고는 모든 걸 정리하며 개마저 버렸을 거’라는 ‘멜로적’인 상상에 이르렀다. ‘태안 바닷가에 사랑의 추억이 있는 젊은 여인이 버린 게 분명할 거야’라고 멋대로 생각하고, 선배의 글에 그런 뜻을 살짝 담아 댓글을 올렸다.
새 대통령이 유기견 한 마리를 청와대에 들이기로 했다고 한다. 이 개의 이름은 ‘토리’. 한 동물보호단체가 2년 전 도살 직전에 구조한 유기견이다. ‘잡종’인 데다 못생겨서 입양하려는 사람들의 관심을 오래도록 받지 못했다. 대통령은 선거 운동 중 토리 이야기를 듣고 입양하기로 했단다. 대통령은 길고양이 ‘찡찡이’도 오래전부터 키우고 있다. 이 두 마리가 왜 버려졌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상상도 되지 않는다. 알아서 무엇하겠냐만, 마음이 찡한 건 마찬가지. “키우다가 왜? 애지중지 비비고 빨다가 왜? 왜? 왜? 내다 버리느냐?” 이런 질문을 해본다.
“동물을 대할 때 연민(憐憫)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연민은 일정하지가 않다는 게 문제이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의 애정은 선택적이다.” 동물과 관련된 윤리를 오래 연구해온 오스트레일리아 철학자 피터 싱어의 통찰이 내 의문에 답이 되려나.
큰딸이 동생 없는 일곱 살 외손녀의 정서 함양을 위해 개를 사야겠다고 전화한 지 며칠이 됐다. 좁은 집에 개털 날리고, 대소변 냄새가 찌들까 봐 뜯어 말렸었는데, 선배의 유기견, 청와대 유기견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돌렸다. 사지 말고 유기견을 입양하는 게 어떠냐고 전화를 했다. 아이가 좋아한다는 흰색 몰티즈 한 마리야 못 구할까. (나도 잠깐씩이나마 유기견을 돌볼 때가 있다. 둘째 딸이 1년여 전에 입양한 흰색 잡종을 간혹 집에 맡겨 놓으면 내가 챙겨야 한다. 이놈도 그동안 사람들에게서 모진 대접을 받았던지 처음 한 달여는 사람을 피해 구석에 처박혀서 꼼짝하지 않았다. 사랑을 받더니 지금은 애굣덩어리이다.)
큰딸에게 전화한 후 TV를 켜니 자선가(慈善家)로 소문난 가수 박상민이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아이들이 모여 있는 시설에서 봉사하는 모습이 비친다. 그가 아이들을 어르고 웃겨 주자 아이들도 웃는다. 아이들은 밝고, 천진하고, 귀여웠다. 하지만 애처로웠다. 외롭지도, 쓸쓸히도 보이지는 않는데 마음이 안됐다. ‘입양돼서 좋은 새 부모 만나려나?’
어디서 누군가는 “개 같은 인생”이라고 한마디 뱉었을지도 모르겠다. 개를 많이 생각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