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8일 이인복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한 진상조사위원회는 대법원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조사한 결과를 내놓았다. 이후 기자는 법원행정처에서 심의관을 지낸 한 부장판사를 만나 보고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꼼꼼하게 조사한 거 같다. 대법원이 일부 판사들에게 불이익을 주려는 의도로 '블랙리스트'를 만들었을 리 없지 않나"라고 했다. 역시 법원행정처를 거쳐 온 또 다른 부장판사는 조사 결과가 나온 이후에도 계속되는 의혹 제기에 불쾌함을 내비쳤다. 법원행정처 소속 판사들은 이전부터 "억울하다"라는 입장을 종종 보였다.
그러나 일선 판사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한 부장판사는 당시 헛웃음을 지으며 "조사위는 '블랙리스트는 없다'라고 결론 냈다. 그런데 블랙리스트가 저장돼 있다는 컴퓨터를 조사하지 않았다. 그럼 확인을 못 했다고 해야지 없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판사들은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매일같이 시끄럽다"라며 하루에도 코트넷에 몇 건의 글이 올라온다고 했다. 의혹은 계속돼 결국 전국 18개 지방법원 가운데 서울중앙지법 등 15개 법원에서 판사회의가 열렸다.
같은 조직에 몸담은 사람들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저히 다른 시각이었다. 성향이나 가치관 차이에서 비롯된 부분도 분명히 있을 터다. 하지만 그보다는 조직 내 자리에 따라 의견이 갈린 게 크다. 법원행정처는 이른바 고위 법관으로 승진하기 위해 거쳐야 할 '엘리트 코스'로 불린다. 검찰에서 검사 수십명이 할 일을 판사 한 명이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힘든 곳이지만, 그만큼 '인정'받은 사람만 간다는 것이다. 인정받은 판사들은 충성하고, 그 과정에서 헌법에 보장된 법관의 독립은 침해된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뒤늦은 사과는 이런 시각 차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이번 사태를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처음 의혹이 불거진 당시 법원행정처는 언론 보도를 "근거 없는 의혹 제기"라고 했다. 양 대법원장의 사과가 나왔지만, 오래도록 어긋나온 법관과 사법부에 대한 시각을 한순간에 바꿀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이유다. 지금이라도 일선 판사들의 목소리에 집중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