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녹수(張綠水·?∼1506)는 한국사나 역사 드라마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이름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명도만큼 정확하게 밝혀진 사실이 많지 않다.
아버지 장한필은 문과에 급제해 수령까지 지낸 사람이지만 천첩 소생인 장녹수는 아버지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집이 가난해 몸을 팔아 생활했고 혼인도 여러 번 했다. 그러다가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의 남자종과 혼인하면서 그 집에서 일했다.
장녹수가 제안대군 추천으로 궁에 들어간 때는 서른 전후로 추정되며 이미 남편과 아이가 있는 상태였다. 그리 뛰어난 미모도 아니었다. 다만 30대 초반인데도 젊음을 유지해 얼굴이 열여섯 소녀처럼 동안이었고 노래를 유난히 잘해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도 맑은 소리를 냈다. 그래서 예술적 감성이 풍부한 연산군이 “(그녀에 대해) 듣고 기뻐해 드디어 궁중으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궁에 들어간 장녹수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다. “왕이 격노했다가도 장녹수를 보면 즉시 희색을 띨 정도로 교태스럽고 요사스러웠다”는 기록처럼 왕의 마음을 쥐고 흔들면서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한껏 이용했다.
1502년 무렵 장녹수는 숙원(淑媛·종4품)으로 있으면서 이미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영수’라는 딸을 낳은 상태였다. 1503년에는 숙용(淑容·종3품)으로 품계가 올랐고 이듬해에는 자신의 집 주변 민가를 밀어내는 권세를 과시했다. 또 여러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고 심지어 정부 선박을 이용해 평안도 미곡을 무역하는 수완까지 보였다.
연산군은 열아홉에 왕위에 올랐으나 젊은 왕을 지원해줄 정치 세력이 약했다. 연산군은 기존 정치 세력과 마찰을 빚었고 급기야 생모가 비극적으로 죽었다는 진실마저 알고 말았다. 고립무원(孤立無援) 속에서 국왕 권위를 세우려던 연산군은 독재 군주의 길로 치달았고 마음 둘 곳도 없었다. 이런 연산군을 깊이 이해해준 사람이 장녹수였다.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같이 했고, 왕에게 욕하기를 노예처럼 했다”는 말처럼 의중을 잘 헤아렸고 무엇을 원하는지 잘 파악했다.
연산군은 폐위되기 며칠 전 후궁 장녹수와 전전비(田田非) 등과 함께 후원에서 잔치를 열었다. 그날따라 울적했는지 시를 짓고 눈물을 흘렸다. 장녹수와 전전비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연산군이 “지금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뜻하지 않은 변이 있겠느냐마는 만약 변고가 생기면 너희들도 반드시 면하지 못하리라”고 우려했다.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1506년 겨울 연산군은 왕위에서 쫓겨난 지 두 달 만에 유배지 강화도 교동에서 세상을 떴다. 왕의 여자로 살던 장녹수도 연산군이 몰락하자마자 파국을 맞이했다. 연산군이 유배를 떠난 날에 장녹수의 참형이 결정되었다. 5~7년여 동안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후 맞이한 비극적 결말이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