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상장기업들이 수중에 막대한 현금을 쌓아놓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지만 IT 분야를 중심으로 한 혁신을 지렛대로 삼아 기업들이 엄청나게 돈을 벌어들이면서도 투자를 꺼려하는 것이다. 이는 경제의 병목 현상을 심화시키는 한편 정부 부채가 급증한 이유 중 하나라고 2일(현지시간)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분석했다.
신문에 따르면 글로벌 기업의 예금과 단기 채권 등을 총망라한 현금성 자산규모는 현재 총 12조 달러(약 1경3740조 원)에 달한다. 이는 10년 전에 비해 80% 늘어난 것이다. 인류가 유사 이래 채굴한 금(7조5000억 달러)을 모두 다 사들여도 돈이 남는다고 신문은 강조했다.
글로벌 상장사의 부채는 현재 19조 달러로, 10년 전보다 7% 증가했다. 부채를 초과하는 현금을 손에 쥐고 있어 사실상 무차입인 기업은 전체 상장사에서 53% 비중을 차지했다.
지역별로는 미국이 2조8000억 달러, 유럽이 2조1000억 달러, 일본이 1조9000억 달러, 중국이 1조7000억 달러의 현금을 쌓아놓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잉여자금을 축적하는 경영 자세는 일본기업의 전매특허였는데 현재는 세계 기업들의 사실상 ‘일본화’가 진행된 셈이라고 신문은 풀이했다.
기업들의 이런 수동적인 태도에 대한 주주들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행동주의 투자자 대니얼 롭이 이끄는 미국 헤지펀드 서드포인트는 지난달 25일 세계 최대 식품업체 네슬레 지분 약 1%를 총 35억 달러에 인수하고 나서 경영 개선을 강요했다. 서드포인트 요구의 핵심은 “긴박감을 가지고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였다. 네슬레가 보유한 현금은 245억 스위스프랑에 달했다. 서드포인트는 이런 막대한 현금을 쌓아놓고도 개혁을 게을리하는 경영진을 두고 볼 수 없다고 압박했다. 이틀 후 네슬레는 오는 2020년까지 보유 현금의 80%에 해당하는 200억 스위스프랑의 자사주를 매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산업구조 변화도 기업 현금 축적의 주요 원인이라고 신문은 설명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혁신으로 성장한 IT 기업들은 대형 설비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보유 현금 용도는 연구ㆍ개발(R&D)과 인수ㆍ합병(M&A), 자사주 매입 등으로 제한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애플이다. 애플의 현재 현금성 자산은 2568억 달러로, 아이폰을 처음 출시했던 2007년 이후 17배나 증가했다. 애플이 보유한 현금은 일본 최대 자동차업체 도요타 시가총액을 크게 웃도는 것이라고 신문은 강조했다. 최근 10년간 현금이 크게 늘어난 대기업 대부분이 IT 부문으로부터 나왔다.
우리나라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도 지난 10년간 현금성 자산이 무려 561억 달러 늘어나 증가속도로는 세계 6위에 달했다.
현금이 지나치게 많으면 재무상태는 안정적이지만 경영 효율성 측면에서는 좋지 않다. 이에 애플은 2012년 이후 지금까지 2000억 달러 이상의 자사주 매입과 배당금 지급 등 주주환원을 실시해 왔으며 지난 5월에는 팀 쿡 최고경영자(CEO)가 주주환원 규모를 3000억 달러로 높일 것이라고 밝혔다. 인공지능(AI) 관련 스타트업 등 50여 개 기업도 인수했지만 현금의 팽창은 그치지 않고 있다.
유망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기업 자금은 계속 금융시장에 남아있다. 예를 들어 미국 주식의 최대 구매자는 자사주 매입을 실시하는 기업 자신이며 일본에서도 자사가 대주주인 기업이 전체의 10%에 달한다.
한편 이런 잉여 자금을 빨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정부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각국 정부는 재정지출을 확대하고 부채를 부풀렸다. 미국과 중국의 정부 부채는 총 36조 달러로, 10년 전보다 90% 증가했다. 기업과 가계의 잉여 자금이 역사적인 저금리 환경을 지탱하면서 정부가 마음껏 국채를 발행하는 등 채무를 늘릴 여유를 갖게 됐다는 것이다.
일본 닛세이기초연구소의 우에노 츠요시 연구원은 “정부 부채가 너무 크면 언젠가는 증세 등으로 국민 생활에 악영향을 미친다”며 “기업이 장기적 관점에서 잉여 자금을 투자해 경제를 성장시키는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