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칠성(1897~1958)은 사회주의 여성운동가이다. 기생에서 사회운동가로 변신하였다고 하여 소위 ‘사상기생(思想妓生)’이라 불리기도 했다. 무산여성의 계급해방을 위한 투쟁에 평생을 바친 혁명가이다.
1897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녀는 8세라는 어린 나이에 기생이 되었다. 기명은 금죽(琴竹)이다. 경성 대정권번(大正券番) 소속의 기생이었던 그녀 인생의 전환점은 3·1 독립만세운동이다. 종로 네거리에서 “흥분에 넘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 그녀는 다른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한다.
새 삶을 위해 그녀는 1919년 일본 유학을 단행한다. 사회주의자가 되어 귀환한 그녀는 고향에서 ‘대구여자청년회’를 만들어 활동한다. 1924년에는 허정숙, 주세죽, 정종명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 ‘조선여성동우회’를 결성한다. 이듬해에는 다시 일본으로 가 도쿄기예학교(東京技藝學校)에 들어간다. 거기에서 재봉, 편물, 자수 등을 배우는 동시에, 도쿄 여자유학생들이 결성한 사회주의 여성단체 삼월회(三月會) 활동에 깊이 개입했다.
1926년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 기자로 잠시 몸담기는 했으나 여성운동에 보다 적극적이었다. 특히 좌우합작의 여성단체인 ‘근우회(槿友會)’가 1927년 5월 결성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가장 열성적인 활동가 중 한 사람으로, 1929년에는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어 지부 조직 강화와 강연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30년대 근우회 운동이 지리멸렬하게 된 후, 그녀의 공식적 조직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사회주의운동이 해외나 지하로 잠적한 대신, 그녀가 선택한 것은 여성들에게 편물과 수예 등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1927년부터 편물강습회를 시작했고, 1928년에는 이를 ‘조선여성직업사’로 발전시켜 여성들에게 자수 및 재봉 등의 직업교육을 하고 있었다. 이는 직업이 여성의 지위 향상에 필수적이라는 그녀의 소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행보는 허정숙, 주세죽 등 사회주의 엘리트 여성들과는 상당히 다른 면모이다. 우선 기생 출신으로 계급적 기반이 달랐던 정칠성은 하층 여성들의 삶에 대한 이해가 상이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공산주의 지하조직운동과 연계 없이 독자적으로 운동을 전개하였다. 더욱이 당시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그 흔하던 ‘붉은 사랑’도 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여성운동에 헌신했다.
정칠성의 이름이 다시 사회 전면에 부상한 것은 해방 후이다. 1945년 ‘건국부녀동맹’, 1947년 ‘남조선민주여성동맹’의 조직원으로 활동을 재개했던 것이다. 1948년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 후 돌아오지 않고 월북했다. 그 후 1956년 조선평화옹호 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후보, 1957년 조선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으로 이름을 올렸으나, 1958년 이후 행적이 끊겼다. 숙청설이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